여름, 감자샐러드 그리고 보살핌

동거인의 조건과 감자샐러드 레시피

by 오복파크



- 시장에 감자 나왔더라. 감자 샐러드 해줘!

동거인은 여름이 되면 감자샐러드를 찾는다. 감자를 삶고 으깨서 간을 하고 좋아하는 채소를 넣어 만드는 감자샐러드가 어려운 일도 아닐 텐데. 자기가 먹는 밥을 잘도 차리는 동거인도 야무지게 만들 수 있을 텐데. 감자샐러드는 꼭 내가 해준 것을 먹고 싶어 한다. 아니, 왜?


주말아침, 감자를 미리 삶아놓는 정성을 보이는 바람에 부지런히 부엌에 섰다. 다 익은 감자는 껍질을 까서 매셔로 으깬다. 비건 마요네즈는 넉넉하게 홀그레인 머스터드 조금, 나머지 간은 소금과 후추로 한다. 최대한 얇게 썰어서 소금에 절여둔 오이에서 물이 나오면 물기를 꽉 짜서 감자와 섞어준다. 그 사이 동거인은 빵과 소시지를 굽고 달걀토마토볶음을 만들고 양배추 피클을 그릇에 담는다. 평소에 어디에 쓰는가 싶었던 손수건을 식탁보라며 깔았다. 감자샐러드의 맛은 평범했는데 동거인은 맛있다 맛있다 말을 하면 정말 맛이 생기는 마법을 부리는 것처럼 맛있다 맛있다 한다. 꼬독꼬독 씹히는 오이가 킥이고, 감자는 향긋하고, 간은 적절하다며.


주말의 아점


7년 전, 서울로 삶의 자리를 옮기면서 언니가 살던 집에 들어갔다. 둘이 살기엔 너무 좁아 이후에 더 큰 집으로 옮겼고 지금까지 그 집에 살고 있다. 집안의 어른들은 함께 살게 된 우리에게 빠짐없이 '누구 한 명이 결혼하기 전까지 살면 되겠네'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함께 살며 시집갈 돈을 모으라고 덧붙이면서. 그 말을 듣자마자 기분이 조금 나빠졌다. 그러곤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우리에게 십 대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한 준비기간이었다. 놀랍게도 나는 좋은 대학을 가면 정말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믿었다. 우리 집은 가난한 살림에서 벗어나 한숨을 돌릴 것이며 그리 마음에 안드는 외모는 예뻐질 것이라고. 멋진 일을 하고 그보다 더 멋진 짝꿍도 만날 거라는 쉬운 믿음. 내가 가진 욕구와 궁금증과 고민은 모두 나중에 들여다 봐주는 것으로 덮어두고 일단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원하는 대학에 갔고 사회에 나갈 때가 되었지만 그때 덮어두었던 고민들이 나를 덮쳤다. 나아지는 건 없었고 남은 건 혼란뿐인 것 같았다. 전공을 살리면 돈은 벌겠지만 나는 돈만 보고 일을 할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못되었다. 결국 휴학을 하면서 내 길을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이제 미래를 담보한 안정된 약속이 환상이라는 것을 안다. 어른들은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을 결혼을 위해서 준비하는, 임시적 시간으로 만들었다. 비슷한 전개라는 것을 예민하게 감각한 나는 외쳤다. '안 속아!' 마침 그 당시에 한국의 여성들을 뒤흔들었던(!)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가 나왔고 동거인과 나는 그 책을 돌려 읽으면서 지금, 여기에서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가도 된다는 안심을 얻었다. 책의 일러스트가 들어간 포스터는 지금도 우리 집 현관에 붙어있다.



시간은 흘러 흘러 재계약을 3번이나 했고 같이 사는 시간 동안 집 안에서 우리의 역할도 어느 정도 정해졌다. 실은 내 역할이랄 것은 특별히 없다. (응?) 언니는 주말이면 빨래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화분에 물을 주고 화장실 청소를 한다. 또 평일에 자기가 먹을 밥을 만들고 저장한다. 새로운 경험을 위해 주말에 자주 집을 비우는 나는 청소에서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 빠지게 되었고 내가 어지러놓은 것을 치우는 정도가 나의 몫이 되었다. 가끔은 동거인이 내가 어지러놓은 것들도 정리해주지만... 동거인은 아주 가끔 '너는 좋겠다. 살림해 주는 동거인이 있어서'라고 푸념을 하지만 화를 내거나 규칙을 만들지 않는다. 그저 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갈 뿐.


궁금하다. 나는 이렇게 동거인에게 많은 보살핌을 받으며 '99점짜리 동거인'이라며 떠들고 다니는데 동거인은 나를 어떤 동거인이라 생각하는지, 그리고 친구들에게 나를 어떤 동거인이라 소개하는지.


저녁은 내가. 돼지고기 가지 덮밥.


언니와 함께 사는 중간에 잠깐 애인과 동거를 한 적이 있었다. 몇 해 전부터 애인과 동거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고 나와 라이프스타일이 잘 맞을 거라 생각한 애인을 만났다. 우리는 만나자마자 동거를 준비했고 한 달 후에 동거에 들어갔다. 애인은 나보다 위생의 기준이 느슨했다. 정리를 핑계로 옷가지나 책무더기를 집안 여기저기에 쌓아놓았고, 빨래를 돌리는 날도 규칙적이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땐 설거지를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뤘다. 변기 속에 검은 때가 생길 때까지도 화장실 청소를 하지 않는 그 친구와 함께 살면서 화장실 청소는 내가 맡았다. 그때서야 나는 언니와 함께 살 때 한 번도 화장실 청소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사는 동안 이게 다 그동안 내가 언니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다 내가 지은 '업'이었다. 청소를 하면서 '업장소멸'을 시도했지만 그와의 동거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생활습관은 양보하며 맞춰갈 수 있었지만, 미처 보지 못했던 취약함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피가 섞인 동거인에게로 돌아갔다. 나의 취약함을 다 알고 돌봐주는 이에게로.


전 연인과의 동거로 생긴 상처가 아물지 않았는데 새로운 연인은 동거를 원한다. 오마갓. 새로운 집을 구하면서 나에게 의견을 물어보는 그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한없이 잔잔한 바다 같은 그의 취약함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약한 부분은 누구든 꽁꽁 감춰놓기에. 잠깐 만나서 밥을 먹고 걷고 커피를 마시고 이야기를 하는 데이트에서는 만나지 못할 것이기에. 매일의 일상을 함께해야 발견할 수 있기에. 나도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진다면 언젠가 그와 함께 살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언제 '새로운' 동거를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고 동거를 할 것이다. 그게 다시 부모가 될지, 서로 뜻이 맞는 친구가 될지, 평생을 약속한 연인이 될지는 모를 일이다. 동거의 그 많은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일이 더 낫다. 지친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혼자 밥을 챙겨 먹고 밤을 보내고 그다음 날 아침을 맞는 생각을 하면 끔찍하기 때문이다. 또 맛있는 것을 정성스레 해서 누군가와 함께 먹는 일은 혼자서 먹는 일보다 훨씬 맛이 있다는 별 것 아닌 이유들로 그렇다.


내가 고득점 동거인의 반열에 오르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조건을 충족하는 동거인이 되고 싶다. 그건 바로 동거인이 나에게 해달라고 말한 것들. 음식을 먹다가 흘린 식탁 밑 부스러기는 바로바로 치우기, 주방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개수대의 음식물 쓰레기를 비우기, 집안에서 고칠 것이 있다면 같이 고민하며 책임을 한 사람에게만 부여하지 않기, 그의 힘든 일을 들어주고 시답지 않은 말이라 생각해도 반응해 주기, 여름이 오면 언제까지나 감자샐러드를 만들어주기.


- 다음에 또 해줄 거지?


주말 아침 식사를 끝낸 동거인이 감자샐러드를 또 만들어달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이 귀엽고 듣기 좋아서 '당연하지'한다. 이 감자샐러드가 맛있는 이유는 당신에 대한 애정이 들어갔기 때문이라는, 동거인이 진저리 낼 말도 덧붙이면서. 우리가 언제까지 함께 살지 모르겠지만 나는 언제까지고 행복을 지금으로 만들고 싶다. 함께 사는 일은 첫눈에 반짝거림으로 유지될 수 없다. 한 발자국 물러난 지난한 배려들로 이루어진다. 감자샐러드의 맛을 유지하게 위해 다음에는 조금 더 정확한 계량을 해야겠다.



덧. <감자샐러드 레시피>


1. 감자는 깍둑 썰어서 찐다.

2. 그 사이에 오이를 얇게 채 썰어서 소금에 절여둔다.

3. 다 익으면 한소끔 식힌 후에 매셔로 으깬다.

4. 소금으로 기본 간을 하고 채식 마요네즈와 후추를 넣어 잘 섞어준다.

5. 소금에 절여진 오이물을 꽉 짜고 감자샐러드와 섞어준다.

6. 함께 먹어본 후 필요한 간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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