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금요일, 글 한 편씩을 발행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일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생겼을 때 하고 싶은 일은 글을 쓰는 일이었다. 어떤 일들은 글을 쓰고나서야 소화가 되고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보통 때에는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쓰고, 한 달에 한 번은 요가와 한 가지 주제를 엮어서 쓰는 일을 해야겠다고 계획했다. 새로운 일들을 경험하는 일을 좋아하는 탓에 약속한 요일에 하루이틀 밀려 글을 발행하는 때도 있었지만, 매주 한 편이라는 약속은 어기지 않고 있다. 고작 두 달 째지만.
금요일에 글을 발행하고 주말을 보낸 후에는 보통 다음에 쓸 주제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하고 싶은 일을 하려니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는구나, 글을 쓰는 일이 꼭 운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주에는 주제가 떠오르지 않는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고요한 상태에 머물러도, 평소에 글의 소재를 적어놓는 메모장을 들락거려도.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았지만 여전히 주제 없는 빈 손이다. 그렇다면... 쓸 것이 없어도 쓰는 일에 관해서 써야겠다.
쉬는 날인 오늘은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 대학을 졸업한 지 10년, 1600명의 단대 사람들 중 유일하게 남은 인연. 막상 학교를 다닐 때는 그다지 친하지 않았는데 둘 다 전공과 전혀 관련이 없는 분야에서 공부와 일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는 동질감이 우리의 연을 이어줬을까. 전공을 살리는 사람이 드문 게 요즘이라지만 '항해'라는 특수한 분야를 공부한 우리에게는 왜인지 다른 선택이 더 특수하게 느껴졌다. 우리 얼마 만에 만났지. 1년 전에 만났겠지 싶었는데 2년 전이었다. 친구는 2년 전과 별다르지 않게 지낸다고 했고 나는 그게 잘 사는 거라고 축하하며, 평생을 잊지 못할 사건들을 겪은 나의 지난 일들을 납작하게 압축해서 들려주었다. 그러니 그 일들이 정말 납작하니 별 것이 아닌 일이 된 것 같았다. 오랜만의 수다에 조금 가뿐해졌다.
커피를 마시고 전시를 보러 갔다. 전시의 이름은 <기울인 몸들: 서로의 취약함이 만날 때>, 몸과 환대, 돌봄과 다양성에 관심이 많은 내가 좋아할 전시였다. 휠체어 접근성뿐 아니라 또박한 음성 해설과 작품과 나란한 채로 바닥에 깔린 공간 점자가, 그 어느 것도 필요하지 않은 (지금의)나의 몸 역시 반갑게 맞아주었다.
자궁과 유방이 주제인 영상 앞에서 오래 멈췄다. 색깔이 있는 밀가루 반죽으로 여성의 생식기를 설명하는 엄마, 동성 애인과 아이를 가지면서 임신하지 않은 몸으로 수유를 준비하는 트랜스젠더 등 대부분의 여성이 가지고 있는 신체지만 대부분이 낯설어할 이야기들 일거라 생각했다.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어느 정도는 어려워하는 내 모습. 우리의 몸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까지 서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겹쳤다. 가운데가 솟아 보이는 거울은 정면이라도 내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다른 몸인 우리가 서로 잘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겠지. 친절한 음성 해설로 공간을 눈이 아닌 귀로 감각할 수 있는 시간은 특별하고 다정한 경험이었다. 기꺼운 마음과는 달리 기대어 살기와 촘촘한 돌봄의 감각이 없는 나의 몸은 얼마나 서로의 취약함을 받아들이며 기댈 수 있을까? 기대할 수 있을까?
전시장을 나와서는 밥을 먹으러 갔다. 맛집이 즐비한 복잡한 거리에서 간신히 건져낸 나름 괜찮은 식당. 채식을 할 때는 무엇을 먹는지가 중요했는데, 요즘은 누구와 어떻게 먹는지가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돼지고기가지솥밥을 먹으며 집에 있는 돼지고기로 동거인에게 해주어야지, 다음 주에 놀러 오기로 한 비건 친구에게는 돼지고기를 대신해서 두부로 만들어줘야지, 생각했다. 편히 머무를 수 있는 카페에 가는 동안 친구가 좋아하는 빵을 샀다. 허망하게 가 버린 한 사람이 무척 그리운 사람들이 만든 공간에서, 커피 말고 레몬 에이드를 시킬 것을 후회하면서, 지금 이 글까지 당도했다는 이야기를 쓰고 있다.
아침부터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내 머릿속에 맴도는 고민이 있었다. 결혼으로 상대를 '성취'하려는 생각 속에는 어떤 두려움이 있을까?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와 남은 생애를 함께하자는 푸르른 약속은 얼마나 빨리 겨울을 맞을까? 남성과 동료시민으로 관계하며 함께 억압의 구조를 바라보고 고쳐가려는 작업을 하면서 느리게 갈 것인가 혹은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여성 파트너와 먼저 '미래'로 갈 것인가? 지금 여기에서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을 얼마나 무리 없이 섞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감정이 격했을 때 이 모든 생각들을 상대에게 와르르 쏟아내지 않았다는 것과 상처를 주지 않고 대화 나누는 방법을 고민했다는 것. 그리고 쓸 것이 없는 상태에서도 쓰려고 앉아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
처음 버지니아 울프의 책 <자기만의 방>을 읽었을 때는 혼란스러웠다. '자기만의 방'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서 들어왔던 의미들과 별개로 '별 것도 아닌' 사사로운 글이 적혀있었으므로. 6개월간 상선을 탔을 때 아빠가 보낸 메일을 보았을 때는 크게 울었다. 맞춤법이 틀린 짧은 글에서 그리움조차 서툰 것이 느껴졌기에. 어떤 글에 어떤 의도를 담을지 어떻게 쓸지 대단하게 고려하지 않아도 되는지 모르겠다. 그 글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방처럼, 아빠의 메일처럼. 그러니 나는 오늘도 시간에 맞춰서 글을 쓰는 데에 의미를 두기도 한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이 글 자체로 의미를 가진다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