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일 N개 비우기 프로젝트, 보틀팩토리 나누장과 함께
1일 차엔 1개, 2일 차엔 2개, 3일 차엔 3개의 물건을 비웠으면 16일 차에는 총 몇 개의 물건을 비웠을까요?
나에게는 미니멀리스트를 탐하는 습관이 있다. 한창 국내에서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때 시작되었으며 때때로 미니멀리스트들의 책을 읽고 그보다 자주 유튜브를 보면서 그들의 일상을 엿본다. 거실에 가구 하나 없는 집을 보며 '저렇게 살면 재미없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물건을 제자리에 잘 놓지도 못해 한번에 치우느라 애를 먹는 나를 보면서 물건이 빈 공간을 상상한다. 무채색의 옷 몇 벌만 있는 옷장을 보며 '저러면 밖에 무슨 재미로 나가나'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실은 사람을 만날 때 옷차림보다 그들의 눈빛이나 분위기가 기억에 남지 않느냐'는 옷장 주인의 말간 얼굴을 보면 그 생활이 궁금해진다. 가방 하나에 짐을, 아니 집을 짊어지고 다니는 세계 여행자들을 보며 ‘조금만 걸어도 몸이 무거워져서 땅으로 꺼지는 거 아닌가'하면서도 어디에도 아무것도 남겨두고 오지 않은 저들의 가뿐함이 세계 곳곳에 찍는 발자국을 동경한다.
여느 날도 그렇게 한 미니멀리스트의 일상을 엿보다가 처음 미니멀 라이프를 시작하며 물건을 비우는 프로젝트를 했다는 말에 솔깃했다. 1일 차엔 1개, 2일 차엔 2개, 3일 차엔 3개... 그렇게 100일. 100일이라는 말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비워진 삶은 얼마나 가벼울까. 과정의 어려움은 미뤄두고 홀홀한 가뿐함을 상상하며 나도 딱 30일만 해보기로 했다. 'N일 N개 비우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첫날 아침, 한 번도 입지 않는 레깅스를 손에 들었다. 예쁜 천을 책상에 깔고 사진을 찍었다. 두 번째 날 아침, 기장이 조금 짧아서 손이 잘 안 가는 요가바지 하나와 이미 같은 색이 있는 가디건 하나를 가지런히 갰다. 역시 천 위에 두고 사진을 찍었다. 셋째 날 아침, 하트 모양에 반해 샀지만 길이감이 안 어울려서 내내 서랍에 있던 목걸이와 역시 영 안 어울리는 모자, 오래된 여행 파우치를 천 위에 올려두고 사진을 찍었다. 그렇게 4,5,6... 10일 차.
10일 차가 지나니 조금 벅차기 시작했다. 하루에 10개가 넘는 물건을 비워야 하니 당연하기도. 지속하는 데에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던 차에 나의 전 직장이자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인 공간 보틀팩토리에서 플리마켓(이하 비우장)을 열 계획이며 셀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보았다. 비우장까지 남은 시간은 6일, 물건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고 있었으니 비우장에 가지고 나가자 싶었고, 딱 그날까지만 물건을 더 비워보자 했다. 자자 이제 어디에 손을 댈까. 영어공부 하겠다고 한 번에 몇 권씩이나 사두고는 떠들어보지 않았던 원서들, 미안해서 정리하지 못하고 두었던 지인의 책을 정리했다. 상장의 100배 두께는 되는 상장 케이스, 다 해져버린 주방솔, 언젠가 쓸 수도 있을까 싶어 모아둔 지퍼까지 구석구석 살림살이에 손길을 뻗쳤다.
비우장 당일 장꾼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각자 취향이 보이는 옷, 가방, 그릇과 한때 취미였을 것들, 팔기 모호해 무료로 내놓은 갖은 물건들, 내가 가져온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나의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고 짐을 비웠을 사람들. 동네 사람들이 기부해 준 물건도 책상을 가득 매웠다. 이 물건들의 수익금은 한 시민단체에 기부될 것이었다. 수많은 물건 더미에서 조만간 사야지 싶었던 딱 원하는 모양의 휴대폰 보조배터리를 발견했다. 내가 가지고 나간 모카포트가 필요했던 분이 나에게 필요한 것을 물어본 덕분에 역시 사려고 벼르고 있던 검정가방을 얻을 수 있었다. 나에겐 줄 수 있는 모든 이야기를 다 전해준 책이 누군가에게 새로운 이야기로 다가오는 것에 기쁨을 느꼈다. 비우장을 무사히 마쳤다.
비우장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은 나에게 '아직도 비울 것이 남았냐며' 웃었다. 그 말에 나도 웃었다. 8개월 전쯤, 이사를 하고 나서 안 쓰는 물건을 한 플리마켓에 엄청 가지고 나갔고, 그 친구는 나의 옆자리에서 물건을 팔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비울 것이 남아있다. 비우장이 끝나고도 여전히. N일 N개 비우기 프로젝트로 100개가 넘는 물건을 비웠어도 머릿속에 비우고 싶은 것들이 떠오른다. 며칠 전에는 아예 큰 가방 하나를 문 뒤에 매달아 두고 쓰지 않는 것들을 모아두고 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가방을 열어보았을 때 그 물건이 있는지 조차 몰랐던 것을 알아차리며 미련 없이 비우는 상상을 해본다.
나의 상상에는 친구들과 이웃들이 함께 있다. '우리 지구의 날을, 새해를,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장터를 열자! 하면 재미있게 모일 이들이. 서로의 물건에서 필요와 쓸모, 매력과 애정을 발견하면서 일상을 나누는 이들이. 우리의 삶에는 사람이 끊임없이 오고 가는 것처럼, 물건 또한 그럴 것이다. 텅 비어 새하얀 거실을 만들지는 못하지만, 한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의 옷을 가지진 못하지만, 가방 하나에 나의 모든 짐을 싸는 것은 평생 어려울지 모르지만 비울 것은 때를 알고 비우는 일을 바지런히 하는 그런 사람들도 미니멀리스트라 부를 수 있을까. 지인의 말에 나는 '비울 것이 계속 생기네요.’라고 말했다.
"수도회에서는 외출할 때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나갑니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거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에게도 나중에 해야 할 말이나 건네어야 할 감정을 남겨두지 않습니다. 잔여를 남기지 않는 삶에 익숙해지면 죽음 앞에서 그렇게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일은 없을 거라고 수도회에서는 가르치죠"
20여 년간 호스피스에서 환자를 돌봄 하는 마르타 수녀님의 말이다. 나는 이 글을 읽자마자 한 사람이, 그와의 정리하지 못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에 대한 비난의 마음과 응원의 마음이 시도 때도 없이 올라와서 나의 일상에 무언가를 자꾸 남기고 있었다. 죽음, 내가 만약에 곧 죽는다면, 그 친구가 보고 싶을 것 같았다. ‘사랑 말고 다른 감정을 느꼈다면 모두 내가 부족한 탓이야, 너는 정말 소중해, 너를 정말 사랑했고 너는 정말 사랑받는 사람이야.‘ 필요 없는 물건을 정리하고 꼭 필요한 물건만 남겨두는 것과 꼭 필요한 말은 건네고 그렇지 않은 감정을 잘 정리해 두는 일은 다른 일이 아니었다. 그런 삶은 얼마나 가뿐할까? 매일 아침 새로 태어난 것처럼 말이다. "하나의 삶은 하루와도 같아요. 오늘 하루를 꽉 차게 살고 죽음을 맞이하듯 마무리하면, 내일이라는 다른 시간이 또 새로운 삶으로 시작됩니다. 죽음은 늘 보이는 곳에 함께 있어요."
수녀님의 말에서 촉발된 '죽음'을 염두에 둔 비우기는 나에게 또 다른 방식의 비우기를 알려주었다. 어렸을 때 엄마가 지점토 위에 '한빛아 사랑해'라고 글씨를 만들어서 나에게 주었다. '맨날 나만 미워해'를 입에 달고 살았던 어린 나는 엄마가 평소에 좋아하는 남동생도 아닌 나에게만 그걸 주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그 마음은 그로부터 20년이 넘어도, 내 나이가 서른을 넘겨서도 지속되었다. 나는 내면아이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엄마가 나에게만 사랑의 선물을 준 사실을 믿고 싶어서 지점토를 내 방 한편에 놓아두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말을 믿기로 했다. 내가 죽기 전에 엄마가 보여준 사랑을 내가 믿지 않았다는 걸 알면 엄마는 얼마나 속상할까. 그 말을 믿으면, 그 즉시, 사는 내내 얼마나 더 많은 사랑을 믿을 수 있을까. 믿는 동시에 나는 그 물건이 필요 없어졌다.
친구들의 편지를 정성 들여 읽고는 정리했다. 나 역시 친구들에게 편지 쓰는 일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편지를 잘 쓰지 않는 대신 시간에 정성을 들인다. 언젠가로, 편지 속 글자로 미뤄두지 않고. 선물 고르는 걸 어려워하는 김에 선물 대신 친구 몸의 일부가 될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한 끼 만들거나 사주려 한다.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살아있는 애정을 확인한다.
일상적 비우기를 시작하자 그 자리에는 고요함이 남는다. 가뿐함도 있다. 비를 즐기는 자유도, 방방 뛰는 즐거움도, 사랑을 느끼는 순간도, 사랑하는 시를 나누는 순간도, 부끄러워도 계속 쓰는 일도, 누군가를 초대하는 일도, 초대한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는 일도, 내가 좋은 것을 눈치 보지 않고 계속하는 능력도 있다.
남겨두지 않고 모두, 오늘, 지금 하자. 분명 그러길 잘했다 생각할 것이다. 내일이면 새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아, 그래서 물건은 총 136개를 비웠다.
<참고하고 인용한 책> 돌봄의 상상력(김영옥, 류은숙)
<사진에 나온 공간과 사람들> 보틀팩토리와 그 친구들
*사진은 모두 직접 찍었어요. 타인의 얼굴이 있으니 사용하는 일은 삼가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