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 대한 글을 쓰기 전에 일기장과 휴대폰 사진첩을 들여다보았다. 병원에 본격적으로 다니기 전 지금보다 훨씬 통통한 얼굴에 생기 있는 표정을 담았던 아빠. 병실에 누운 채로 카메라에 대고 천진하게 브이 포즈를 하기도 했던 입원 초기. 시간이 지날수록 작아지는 몸. 표정이 싹 거둬진 채 점점 쪼그라드는 얼굴. 아빠와 병원을 다닌 지난 반년의 시간이 스쳐 지나가면서 문득 목소리가 듣고 싶어져서 바로 전화를 걸었다.
- 아빠 뭐 해?
그냥 집에 있지.
- 밥 먹었어?
엄마 오면 먹어야지.
- 오늘 뭐 했어?
레오랑 놀았지.
- 레오는 뭐 해?
아빠 옆에 있어.
- 저녁 뭐 먹으려고?
몰라. 차려주는 거 먹어야지.
아주 단순한 물음에 이어지는 단순한 대답, 별 볼이 없는 어쩌면 하나마나한 대화. '이번 주에 병원올 때 얼굴 볼 수 있으면 보자'하며 전화 종료버튼을 누르니 1분 30초라는 전화시간이 뜬다. 그 시간에서 '발전'이라는 단어가 떠오른 것은 이전에 비하면 세배에 가까운 통화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갑자기 아빠 목소리가 듣고 싶다면서 전화를 거는 일은 잘 없었으니까.
작년 가을쯤, 아빠는 어지러움증과 무기력을 혼자 앓다가 이러다가 죽겠다 싶을 때 가족들에게 알리고 병원을 갔다. 작은 지역의 병원에서는 특별한 병명을 주지는 않았다. 급하게 서울의 대학병원을 수소문했지만 의사들의 파업으로 반년을 훌쩍 넘겨야 외래를 잡을 수 있었다. 사람이 많아 초진이 어렵다는 답변들도 더러 돌아왔다. 그렇게 집 근처에 있는 작은 병원을 다니다가 운이 좋게 사촌동생이 일하는 대학병원에서 의사 선생님과 대면할 수 있었다. 여러 검사를 거치면서 수많은 증상을 하나의 병으로 좁혀갔다. 이름은 재생불량성빈혈, 이름에 '불량'이 들어가다니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희귀병이라는 설명도 붙었다. 아빠는 그 병에 따라오는 약을 먹으면서 치료를 시작했다.
약의 기능은 '면역억제'였다. 아니, 세상천지에서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라는 이유가 다 면역 때문이라고 하는 와중에 면역을 억제한다니. 어떤 기능을 높이기 위해서 다른 기능을 죽이는 것이 말이 되냐고, 이래서 대증요법은 안된다고, 자연치유로 방향을 틀어보자고 나는 고래고래 핏대를 세웠다. 어디서 주워들은 걸로 대충 잘난척하는 나의 말에 호응을 해주는 가족들은 없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혈액세포를 죽이고 다시 재생시키기 위한 작업을 믿고 해 보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아빠는 매끼니을 먹고 나서 면역을 억제해 가면서 쇠약해져 갔다. 입맛을 잃고 살도 빠졌는데 그러다가 합병증으로 폐결핵이 왔다. 혈액내과에서 호흡기내과로 건너갔고, 2024년의 끝을 음압병동에 갇혀서 지내게 되었다. 역시나 대증요법은 말이 안 된다고 나는 또 조금 더 목소리를 높여 대책 없는 주장을 이어갔다.
음압병동에 입원하는 환자는 병실 밖을 나설 수 없다. 창문 하나도 열리지 않는 작은 공간에서. 보호자가 있어야 한다는 병원의 안내에 따라서 서울에 사는 언니와 내가 번갈아가면서 보호자 역할을 맡았다. 나는 연말에 남은 휴가를 몽땅 병원에다가 썼고 언니는 퇴근 후에 병원에 와서 자고 병원에서 회사로 출근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아빠는 꼼짝없이 병실에 묻혀 있었다. 친구들과 바깥밥 먹기를 즐기느라 저녁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았던 사람. 주말이면 어딘가로 떠나 바람을 쐬어야 하는 사람. 집을 멀리 떠날 수 없는 날에는 쓰레기를 버린다는 핑계로 하루에 대여섯 번은 쓰레기가 얼마 없는 가벼운 손으로 현관을 들락날락하던 아빠는 점점 '죽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밥을 반공기도 안 먹었고 짜증과 귀찮음이 늘었다. 몸은 작아졌고 얼굴에선 표정을 거두었다. 아빠는 어느날 청소하러 잠시 병실에 들른 분에게 '지옥 같은 날들이네요.'라는 말을 했고, 청소하는 분은 표정과 행동을 하나도 바꾸지 않고 '병원은 그래요, 지옥이에요.'라고 말했다. 간호사인 사촌 동생이 병실에 들러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삼촌 괜찮아요?'라는 말을 건냈을 때 아빠는 서러운 어린아이의 표정이 되더니 곧 울음을 터트렸다. 20여 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은 후에 처음 보는 울음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서럽고 아픈 아이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은 본 날은 나도 울 수밖에 없었다. 늙으면 아이로 변한다더니, 아빠는 보호자에서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나도 아팠다. 추운 겨울에 반팔을 입고 병실 창가에 붙어서 잔 날에 감기에 걸려버렸다. 아빠에게 감기를 옮겨서도 안되었지만 병원에서 생활하는 것이 참을 수 없어서 집에 왔다. 아프니까 나도 서러워졌다. 그동안 꾹꾹 효자인 척하면서 참고 있던 마음이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나 너무 힘들어. 연말인데 연차 쓰고 여행 가고 싶단 말이야. 한 해가 끝났는데 올 한 해를 지긋이 좀 돌아보고 싶어. 내년을 위한 설레는 계획들도 세우고 싶단 말이야. 그게 아니면 혼자 탁 트인 카페에 가서 조용한 시간이라도 보내고 싶어. 병원 너무 답답해. 병원밥 너무 맛없어.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잠들기 전까지 약을 먹는 아빠의 모습을 보고 있었더니 언니가 건넨 감기약을 보고는 헛구역질이 나왔다.
언니에게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언니는 당분간 자기가 병원에 갈 테니 쉬라고 했다. 일과 중에는 일하고 밤에는 병원에서 지내는 언니도 이 일상이 기껍지 않을 거라서 그 답변이 달갑지 않았다. 착실한 언니와 생떼 부리는 나 사이에 느껴지는 온도차에 괜히 짜증도 났다. 언니는 언제나 구체적으로 아빠에게 필요한 것들을 가져다주거나 나에게 가져다 달라 부탁을 했다. 혈액 검사 수치를 엑셀에 만들어서 착착 적어두고는 똑 부러지게 상황을 파악했다. 언니의 일상 한 편에는 벌써 아픈 아빠를 돌보는 시간과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언제쯤 그게 가능해질까.
20대 초반부터 에코페미니즘을 만나면서 나도 조금씩 그 가치관에 스며들면서 지냈다. 에코페미니즘은 특히나 '돌봄'을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돌봄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경제보다 돌봄이 먼저라고. 그런 돌봄을 비가시적이고, 비경제적이고, 비생산적인 활동이라 치부하지 말자고. 나는 아빠 곁에 있으면서 그 간에 내가 얼마나 돌봄을 겉으로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여유 있을 때 친구들을 초대해서 밥 한 끼 해주는 것이나 친구들과 안부를 나누는 것이 내 손에 닿는 돌봄의 전부였다. 정말로 돌봄이 필요하고, 돌봄이 있어야만 일상이 가능한 사람이 주변에 있어도 내 책임이라고 느껴 본 적이 없었다. 힘이 부치기 전에 쉬어가는 여유를 부리면서 여행도 하고 요가도 하는 것이 돌봄 중에서도 으뜸인 자기 돌봄이라고 착각하기 좋은 세상이었다. 누군가를 돌보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의 한편을 온전히 내어주어야 하는 것도 몰랐다. '비생산적인' 돌봄보다 '생산적인' 활동을 해야 비로소 앞서가며 잘 사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병원에 가기 싫어서 현관 앞에서 혼자 울고 있었다. 가기 싫어, 힘들어, 하면서. 한참 울고 추스르던 차에 동료 '차'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빠 병문안을 가기로 한 날인데 가도 괜찮겠냐고. 나는 상태가 안 좋아서 다음에 오면 좋겠다고 했다. '차'는 곤란해하면서 아버지에게 주려고 만들어 놓은 반찬이 있어서 꼭 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눈물에 푹 젖은 몸과 초췌한 표정으로 ‘차’를 맞이했다. ‘차’는 지하철로 한 시간 반이나 되는 거리를 오면서 한 손으로 잠깐도 들기 무거운 반찬을 싸가지고 왔다. 아니 ‘차’, 우리 아버지 얼굴 한 번도 본 적도 없잖아?
‘차’는 본인이 일주일에 한 번 아버지 간호를 할 수 있으니 필요하면 말해달라 했다. 골수이식까지 염두해야 하는 아빠의 병을 듣더니 자신의 골수가 맞으면 기증을 하겠다고 했다. 아니 ‘차’, 우리 아버지 얼굴 한 번도 본 적도 없잖아? ‘차’의 표정은 심각하고 진지하기 보다는 가볍고 신이 나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차’의 말에 벅차서 말만으로도 고맙다고 다시 깨끗이 돌려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쏙 다시 가져왔다. 만약 일주일에 한 번 아픈 '차'의 아버지를 나를 포함한 친구들이 돌봐주는 상상을 하니,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빼박'으로 돌봄을 수행해야 한다고 틀을 만들어 온 가족 돌봄과 달리, 조금 더 가볍고 기껍고 다정하게 돌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차‘가 오늘 꼭 와야만 했구나. 그날 아빠는 '차'가 만들어 온 시금치나물을 맛있게 먹고는 한 번 더 달라고 말했다. 나는 돌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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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는 부모와 자식이 아니라 시민과 시민으로 관계 맺으려 한다. 내가 아버지를 돌보는 가장 큰 이유는 아버지가 사회적이고 신체적인 약자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내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가족 관계 증명서'가 있듯이, 아버지와 나의 돌봄 기간을 증명하는 '시민 관계 증명서'가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민 관계 증명서'는 아버지가 알코올 의존증과 인지 장애증 환자이기 이전에 한 사회의 성원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내 돌봄이 비가시적인 소모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갖는 행위라고 인정한다. 아버지와 내 관계가 부모와 자식일 뿐 아니라 유동적이고 다양하게 연결되는 사회적 관계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가족이라고 말해지기 전에 우리는 하나의 사회라고 선언한다. 나는 효자가 아니라 시민이다. (나는 아빠의 아빠가 됐다, 조기현)
아픈 사람을 옆에서 돌보게 되면서 나는 기도를 할 수 있는 자리에 가면 그(아빠)를 위한 기도를 한다. 그가 충분히 병을 겪어내게 해달라고, 완치된 그때가 아니라 지금 현재의 소중함을 알고 생활하게 해달라고, 만일 가능성이 있다면 말끔히 회복하게 해달라고.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자에게 바라는 점을 적는 캠페인에서도 그를 떠올렸다. 간호사들과 의사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일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달라고, 그게 결국 환자를 위한 일이라고. 또 의료보험이 민영화되지 않게 꼭 국가에서 관리를 해달라고. 그래야 가난한 사람들이 서럽지 않고 아플 수 있다고. 나의 소원은 난생처음 나를 벗어나 구체적인 옷을 입었다.
그를 맞이하고 바래다주는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에서 그와 같이 병원을 오가는 사람과 그 사람을 돌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식당에서 느리게 밥을 먹고 잊지 않게 약을 챙기고 약다발을 다시 주섬주섬 가방에 집어넣는 모습을 놓치지 않게 되었다. 서로의 처지를 알아본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고 어느 병원을 다니고 어느 병을 앓고 있다는 대화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가까운 이가 병을 앓고 있다는 지인의 말이 얼마나 무겁고 축축한 사실로 다가오는지 그 간에 누군가 아프다는 말을 흘려들었던 나의 무심함이 미안해졌다. 결혼을 할 생각도 아이를 나을 계획도 없는 '차'가 서로 돌보면 살기 위해서 공부하고 실험하는 일이 얼마나 값지고 신나는 일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는 요즘 1~2주에 한 번씩 병원엘 가기 위해서 서울에 올라온다. 초진 환자를 받지 않는다는 대학병원에 틈이 날 때마다 전화를 건 그의 동생 덕분에 그는 조금 더 나은 환경의 병원을 다니게 되었다. 특유의 서두르는 걸음과 미리 몇 번이고 되뇐 계획으로 그는 혼자서 병원을 다닐 수도 있지만 나는 그가 올라올 때마다 언니와 번갈아 가면서 병원엘 함께 간다. 내가 하는 일은 실은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옷을 받아주고 음식을 계산하고 가족들에게 검진 결과를 알려주는 일 밖에는 없다. 그의 동생과 달리 병원엘 다니면서 내가 고통스러웠던 날들을 회상하거나 새롭게 보게 된 것들을 곱씹으면서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글쓰기를 하고 앉아있다. 그를 혼자 병원에 보내고 책을 읽고 싶고, 친구들을 만나고 싶고, 쉬고 싶다는 마음도 매번 든다.
그는 아직은 합병증 치료 중이라서 새 병원에서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가지 않았다. 면역억제제를 또 먹어야 하고 골수검사를 또 해야 하고 몇 번의 입원과 퇴원을 반복할지 모르겠다. 그 시간들이 다가오는 게 긴장이 되고 두렵기도 하다. 그래도 반년 전보다는 조금 더 나아질 것이 분명하다. 억울함과 조급함을 온몸으로 뒤집어쓰고는 이게 뭐냐고 찡그리기 전에 나의 상태를 돌아보기도 하게 되었으니까. 그를 온전히 돌봐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서 언제든 '차'를 포함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의 희귀병 치료를 돕는 국가의 의료보험 제도가 있으니까. 많은 사람들이 투병과 돌봄의 길을 함께 걷고 있으니까.
나는 점점 돌봄을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를 마중하러 집을 나선다. 언제나 '맛있는 거 먹고 맛있는 거 마시고 오라'고 말해주는 듬직한 언니 덕에 발걸음이 가볍다. 길고 긴 병원의 대기시간, 나는 그의 손을 잡고 주무르고 어깨를 두드린다. 흰머리를 구경하다가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고 피곤할 때는 그의 어깨에 기대어 잠을 자기도 한다. 그가 아프면서 그를 난생처음으로 부끄러움 없이 꼭 안을 수 있게 되었고 은근슬쩍 그의 손도 잡고 걸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그가 병원에 오는 날을 '병원 데이트 하는 날'이라고 부른다. 바깥에서 맛있는 거 먹고 손도 잡는 날.
글쓰기를 마치니 또 그가 보고 싶다. 그가 보고 싶을 때는 언제고 주저 없이 전화를 걸 것이다. 질문은 지루하고 대답은 뻔한 대화를 언제든 이어갈 것이다.
- 아빠 뭐 해? 밥 먹었어? 오늘 뭐 했어? 레오는 뭐 해? 엄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