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계절을 되찾다

그땐 몰랐던 풍경들

by 두나씨

아침부터 봄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비가 오니 뜬금없이 파전이 생각나서

냉장고를 뒤적이다 쪽파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귀찮아서 그냥 넘어갈까 하다가

우산을 챙겨 슬리퍼를 신고, 자박자박 동네 마트까지 걸었다.


코끝엔 비에 젖은 풀 내음이 가득 퍼지고,

우산 위로 또르르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어쩐지 근사한 음악처럼 들려왔다.


‘이제 정말 봄이 오려나..’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잠시 눈을 감고 이 순간을 천천히 만끽해 본다.

이렇게 온전히 계절의 정취를 느껴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예전엔 평일에 비나 눈이 오면

그날 하루가 괜히 더 무겁게 느껴졌다.

가뜩이나 가기 싫은 출근길에

우중충한 날씨까지 더해지면

몸도 마음도 물먹은 솜처럼 축축 처졌다.

그런 날 출장이라도 잡혀 있으면

아침부터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엇보다 가장 부담스러웠던 건 ‘비상근무’였다.

밤새 비가 퍼붓거나 눈이 쌓이는 날이면

자기 전부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새벽에 또 비상 걸리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 속에 선잠에 들기도 했다.


그러니 그 계절의 풍경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여유 같은 건

애초에 허락되지 않았던 셈이다.


어릴 땐 그렇게 좋아하던 눈조차도

어느 순간부터는 ‘치워야 하는 일’이 되었다.

들뜨고 설레던 마음은 사라지고,

눈은 그저 부담감과 한숨을

안겨주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잠깐의 회상을 마치고 조용히 눈을 뜬다.

비 내리는 거리의 풍경은 뜻밖에도 평화로웠다.

놀이터에는 파란 우비를 입은 아이가

웅덩이를 첨벙거리며 뛰어다니고 있다.

그런 장면조차 내겐 작은 선물처럼 느껴진다.


재료를 사고 돌아오는 길에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며 걸었다.

퇴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참 이상한 변화다.


그렇게 비 오는 날을 싫어했는데

별일이다 싶다가도

이 조용하고 느린 풍경이

내가 잃어버렸던 계절이고

되찾은 나 같아

괜히 마음 한편이 따뜻해진다.


요즘은 시선이 자주 멈춘다.

계절의 감각을 되찾으니

예전엔 그저 스쳐 지나가던 일상의 장면들이

자꾸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길을 걷다 바닥을 기어가는 무당벌레를 보았다.

괜히 귀여운 마음에 손가락을 뻗었고

요리조리 손을 피해 움직이는 모습이 재밌어

한참을 바라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창밖에서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붉게 물든 저녁노을이 아름다워

괜히 한 번 더 바라보게 되는 요즘이다.


오늘도 비가 내린다.

예전의 나라면 우중충한 날씨에

괜히 기분부터 가라앉았겠지만

지금은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본다.


계절이 변한 건지,

아니면 내가 변한 건지

모르겠지만

오늘은 이 조용함이 그저 좋다.


바쁘지 않은 하루와 빗소리, 그리고 커피 한 잔.

그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