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나는 길이 달라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따라온 우리들이 함께하기 위해 넘어야 했던 산
삶의 교집합이 없을 때 듣는 재즈
Movie
라라랜드
Place
LA
Music
Jazz
오늘은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라라랜드' 속 주인공 세바스찬의 세계는 ‘재즈’로 가득 차 있다. 미아와 연애를 할 때도 피아노 선율이 구슬처럼 미끄러지는 재즈바를 가고, 이후에는 자신만의 재즈 클럽을 차려 직접 연주를 한다. 음악에 대한 확고한 철학과 고집을 지녀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물질적인 성공보다는 꿈과 신념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뮤지션이다. 미아 또한 꿈을 이루기 위해 열심이다. 배우가 되고 싶은 열망으로 오디션에 도전한다. 미아는 오디션에 합격해 파리로 가게 되고 세바스찬과 미아는 각자의 꿈을 이루지만 함께하지는 못한다.
그는 초등학생 때 미국 LA로 유학을 가 그 곳에서 대학까지 나왔다. LA를 배경으로 한 라라랜드를 보니 고향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나보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떠들었다.
'여긴 그리피스 천문대야! 진짜 별을 볼 수 있어. 어? 더라이트하우스 카페다. 나도 저기 가봤는데.'
'허모사비치 피어 해변에서 드라이브하면 정말 기분 좋았었지.'
'크, 나도 저 콜로라도 스트리트 다리를 걸었었는데.'
그는 자유로운 학창시절을 보내었고, 고등학생 때는 입시경쟁이 없어 하고 싶은 걸 하며 지냈다고 한다. 이 후 미군에 입대하였고 한국에는 군인으로 복무를 하러 오게 되었다. 반면 나는 평생 한국에만 살았고 한국에서도 경상도 밖을 벗어난 적이 없다. 스무살이 되기 전까진 서울에 가본 적도 없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이라 내가 접한 서울은 티비 속의 서울이 전부였다.
세계 최대 도시 LA 에 살던 그와 한국의 작은 도시에 살던 나는 아무래도 교집합이 없었다. 불현듯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각자의 위치로 돌아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가 지금은 한국에 있지만 걱정이 되어서 물어봐. 군복무가 끝나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거야?'
'응, 맞아.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서 대학원을 다닐 예정이야. 거기서 취업도 할 거고.'
아뿔싸, 너무나도 다른 삶을 살아온 우리였기에 미래를 맞춰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국적이 다른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서는 넘어야할 현실적인 문제가 많아 힘겨웠다. 우리도 라라랜드의 세바스찬과 미아처럼 현실의 벽에 부딪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정말이지 그 문제가 현실로 나타났다. 갑자기 그가 한국을 떠나 텍사스에서 복무해야한다는 명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군인 신분인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갑자기 찾아온 이별에 당황스러웠지만 남은 날짜를 세어가며 데이트를 했다. 그가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데이트를 부지런히 하며 추억을 선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고 그가 텍사스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기약 없는 이별. 우린 최악의 상황인 이별을 상상하였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그저 그 시간들을 견뎌냈다.
그 시간은 참 아프고 힘든 시간이었다. 더위를 많이 타는 그는 태양빛이 뜨거운 텍사스에서 구르며 한국에 돌아올 방법을 궁리했다. 나도 경상도 밖을 벗어나 살아본 적 없다가 갑자기 미국에 살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영어도 부족하고 대학도 한국에서 나온 내가 미국에서 무엇을 하며 살 수 있을까?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따라온 우리들이 함께하기 위해 넘어야 했던 산은 거대했다. 현실적으로 비자 문제도 걸렸다. 우리가 함께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에게 작은 찰나들이 겹치고 겹쳐서 생긴 이 인연의 끈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노력했고, 나는 나대로 노력했지만 불투명한 미래에 불안감이 더해졌다. 미아는 파리로 가기 전 언제나 세바스찬을 사랑할 것을 약속하였지만 결국 헤어지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헤어지게 되지 않을까? 세바스찬은 재즈를 하고, 미아는 배우가 되어 각자의 삶을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한국과 미국의 다른 시차로 잠깐 통화할 때마다 인연의 끈을 붙잡고 따라가려고 애썼다. 그와의 통화를 마치고 나면 종종 세바스찬의 재즈가 떠올랐다. 라라랜드를 보기 전에는 재즈를 들어본 적 없던 나였지만 어느 순간 세바스찬이 말하는 정통파 올드 스쿨 재즈를 찾아 듣기 시작했다.
나는 재즈를 '삶의 궤적의 교집합이 없을 때 듣는 음악'이라고 이름 붙였다. 머나먼 땅에 있는 그가 보고 싶어 힘겨울 때면 세바스찬이 떠나는 미아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재즈를 들었다. '흘러가는대로 가보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많은 생각이 들게 했다. 눈이 마주친 미아와 세바스찬의 미소. 서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듯한 목례. 단 한마디 대사도 없지만 눈빛으로 느껴지는 감정들. 미아는 세바스찬을 보고 잠깐이나마 둘 사이에서 생긴 아이와 함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상상을 한다. 그렇게 어쩌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순간들이 이어진다. 나도 미아처럼 상상을 한다.
만약 그가 갑자기 한국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우린 한국에서 행복하게 사랑했을까?
인생에 '만약'이란 없다고 한다. 찰나의 선택들과 순간들이 모여 인생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고. 미래는 알 수 없기에 아직도 두렵다.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어 불안할 때가 찾아온다. 그때마다 재즈를 듣는다. 세바스찬과 미아의 모습을 보며 불안한 마음을 다독인다.
사랑하는 사람과 당장 내일 헤어질지도 모른다는 것, 예기치 못한 사건은 늘 나를 찾아올 수 있고 인간은 예측하려고 해도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
각자가 살아온 궤적의 교집합이 없을 때 듣는 음악인 재즈는 그렇게 나를 위로해주었다.
정말 우리가 세바스찬과 미아처럼 헤어지게 되더라도 헤어지기 전에 이 말은 꼭 해주고 싶다.
너랑 있으면 가진 게 없어도 다 가진 것 같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