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개 먹을까 그냥 버릴까
어린 시절 브라운관에서 방영해 주던 외화에는,
커다란 막대사탕을 하루 종일 핥아먹는 곱슬머리 소년이 종종 나오곤 했다.
사탕 때문인지 앞니는 빠졌지만 그 미소는 너무나 행복해 보였고,
주근깨조차 사랑스러웠던 소년의 얼굴을 다 가릴만한 막대사탕은 내 로망의 대상이었다.
나는 어릴 때도 사탕을 좋아하지 않았다.
스카치 캔디 따위를 먹으면 멀미를 심하게 했을 정도.
입에 넣으면 바스러지는 박하사탕 정도는 먹었을까.
그런데도 생일 때 케이크를 사러 제과점에 가게 되면
케이크 냉장 진열대 위에 올려진 막대사탕을 사달라고 졸랐다.
떼를 부리면 엄마는 져주는 척 매번 사주셨는데,
그렇게 얻어낸 막대사탕을 손에 쥐고 있을 땐 세상 행복했다.
그러나 봉지를 벗겨낸 후부터가 고역이었다.
일단 맛이 없었다.
단 맛을 좋아하지 않는 내가 억지로 사탕을 먹는 거부터 문제였는데, 이 사탕은 그저 달기만 했다.
제사상에 올라오는 요강사탕 딱 그 맛이었다.
게다가 아무리 먹어도 줄지 않는 건 재앙에 가까웠다.
아까워서 버릴 수는 없고,
그렇다고 계속 먹자니 토할 거 같았다.
엄마를 졸라서 겨우 샀는데,
대놓고 버릴 수도 없었다.
결국 봉지에 싸서 방치했다가 다시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아 몰래 땅에 묻었다.
개미들이 없애줄 거라 믿으면서.
그러길 몇 번 반복하고서야,
더 이상 나는 막대사탕을 사달라고 하지 않게 되었다.
커갈수록 사탕을 완전히 싫어하게 되어서,
화이트데이에도 사탕을 거절한다.
하지만 아직도 커다란 막대사탕을 주는 그 느낌을 기억한다.
막대사탕을 보면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건 나뿐만은 아닌가 보다.
우리 아이들도 막대사탕을 하나씩 들고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곧,
어릴 적 나와 똑같은 고민에 빠져서
줄지 않는 사탕을 곤란하게 쳐다보는데 웃음이 났다.
막대사탕은 끝까지 먹을 수 없다.
아이들이 고를 때부터 그 결말을, 어른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부숴먹을 수는 없다.
쪼갤 거라면 처음부터 막대사탕을 살 이유가 없으니까.
맛에 물려 실망하더라도,
커다란 막대사탕을 손에 쥐고 있을 때의 그 잠깐의 몽글한 기분을 알기에,
아이들이 막대사탕 그 모습 그대로 즐기게 내둔다.
결국 똑같이 내버려지더라도.
그게 막대사탕의 딜레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