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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정 Jul 22. 2024

물에 대한 물질적 상상력과 건축

프롤로그

물과 일상의 몽상

꿈을 꿉니다.

물가에 사는 꿈입니다. 그곳에서는 바다와 그에 맞닿은 하늘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습니다. 바삭이는 모래에서 젖은 모래로 걸어 들어가 노닥거리다가, 마음만 먹으면 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숨을 참고 물속을 다니다가 움직이는 물 위에 떠서 다시 하늘을 바라보고 빛을 쬐고, 또 가끔은 모래사장에 앉아 책을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곳에 있는 집은 빛이 잘 들고 바람 소리와 물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대체로 조용한 편입니다. 이리저리 꽂아둔 책으로 가득한 작은 방이 하나 있고, 한쪽에 놓인 흔들의자와 살짝 조율이 엇나간- 언젠가 엄마가 치던 것 같은 오래된 피아노가 있습니다. 고양이 한 마리가 잠에 취해 있다가 인기척에 눈을 끔벅입니다.

숨을 내쉬고 이제 거리를 하나 그려 봅니다. 집에서 오분 정도 되는 곳에 좋아하는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경기가 안 좋다는 염려에 언젠가 가게가 사라져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거기 있을 것 같은 그 카페에서는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옵니다. 카페가 있는 길에는 작은 과일가게와 식료품 가게가 있고, 적당히 출출할 때 먹을 만한 몇 가지 빵을 파는 작은 베이커리도 있습니다.

이제 주변을 둘러볼까 합니다. 

지금 당신 마음의 창으로는 어떤 풍경이 보이나요? 어떤 건물들이 보이나요? 화창한 날인가요? 해무가 짙고 습한 날인가요? 더위와 태풍이 시끌벅적한 한여름인가요? 겨울을 마주 보며 나직한 공기가 소리 없이 차가운 늦가을인가요? 돌로 만든 어둡고 고풍스러운 낮은 건물들이 보이나요? 아니면 잘 정돈된 도시 거리에 세련된 초고층 건물들이 보이나요? 혹은 띄엄띄엄 늘어선, 군데군데 녹이 슨 조립식 건물들이 보이나요? 그곳 가까이에는 절경의 해안 절벽이 있나요? 부드러운 모래가 한없이 펼쳐져 있나요? 지금 마음속 당신이 서 있는 그곳은 바위, 자갈들이 가득하고 해초가 떠다니는 헝클어진 바닷가인가요? 사람 손길로 정돈된 멋진 도시 해변인가요? 어떤 날, 어떤 곳을 보고 있나요?

건축을 생각하는 계기와 방식은 사소하고 구체적일수록 살아있는 것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아는 공간, '내'가 아는 풍경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그곳이 어디건, 어떤 모습이건, 현재 익숙한 공간과 형태에서 점차 낯선 곳으로- 조금 낯선 곳에서 아주 낯선 곳으로. 시선과 발걸음을 옮겨가며 느끼고 생각해 보는 상상과 사색의 여정은 그 자체로 이미 변화와 흐름의 상징, 물을 닮았습니다.

물은 우리 생활과 문화, 예술에서 항상 중요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존재를 넘어서 우리의 감정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체로서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이 좋아 물가에 사는 꿈을 꾸고, 언젠가 물이 되는 꿈을 꾸며 '물의 건축', '물과 건축'을 상상하고 글로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이 책, 「물의 건축」은 물의 속성과 관련된 건축을 중심으로 다룹니다. 물이라는 자연 요소가 건축에서 어떤 방식으로 활용되어 왔는지를 살펴보며, 물의 질료적 특성에 따라 건축을 해석해 보는 접근 방식을 제안합니다.


바슐라르의 물에 대한 물질적 상상력

물은 우리 문화와 사고에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고정된 형태가 없는 유동적인 물질로서 그 형태는 공간에 따라 변화합니다. 기존의 고정관념과 단편적인 이미지를 넘어, 물질적 상상력으로 물의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습니다.

'물과 건축'이라는 여행을 떠나면서 길잡이로 가스통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를 삼았습니다. 바슐라르는 20세기 프랑스 철학자로,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심리적 경험과 상상력에 깊이 접근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바슐라르는 물질이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물질 자체가 우리의 꿈과 시적 상상력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고 말합니다. 그의 이론에서 물질적 상상력은 물, 불, 공기, 흙의 원초적인 물질 요소들이 인간의 상상력과 감수성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탐구합니다. 그리하여 물질적 상상력은 시적 상상력으로 자라납니다. 바슐라르는 특히 '물과 꿈'이라는 주제로 자연 현상과 인간 정서의 상호작용을 탐구하였습니다. ‘물과 꿈’은 이러한 물의 다양한 형태와 이미지가 우리의 정신적, 미적 경험에 미치는 영향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책입니다.

바슐라르는 이 책에서 맑은 물, 깊은 물, 구성된 물, 여성적 물, 부드러운 물, 난폭한 물과 같이, 다양한 물의 형상이 어떻게 우리의 내면세계를 반영하고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깊이 있는 해석을 제시합니다.

먼저, 물은 근원적으로 영원한 생명력을 상징하고 생산의 이미지를 표상합니다. 구석기와 신석기시대의 유적부터 서구의 우주 생성 신화와 인류 생성 신화를 분석해 보면, 물은 생명력의 원천으로 인식됩니다. 이는 때로는 영웅의 남성성으로, 때로는 다산과 풍요의 상징으로 사랑의 여신에서 비롯하는 여성성으로 인격화됩니다.

둘째, 물은 변화와 운동을 상징합니다. 물의 일반적 현상은 변화와 운동으로 자유와 지혜의 이미지를 가지며, 개별적 현상은 하늘의 물과 땅의 물로 나뉩니다. 하늘의 물은 비로, 땅의 물은 강, 바다, 연못 등으로 다시 세분됩니다. 특히 땅의 물은 공간의 형태와 모양에 따라 다양하게 규정될 수 있습니다.

셋째, 물은 정화와 치유의 기능을 상징하며 재생의 이미지를 가집니다. 물이 가진 신성한 힘을 식별하는 기준으로 ‘공간’, ‘기능’, ‘제의’를 살펴볼 수 있는데, 신성한 물의 기준으로는 일상적 공간을 벗어난 신비한 공간이어야 하며, 일반적인 것과 차별되는 특수한 기능을 가져야 합니다. 신의 대리자에 의해 성화(聖化)되는 제의가 필요합니다.

물은 문화적 차원에서 두려움과 공포 및 광기의 이미지로 굴절되면서 괴물의 이미지로 변용되기도 합니다. 특히 물이 가진 생명과 죽음의 이중적 측면이 가진 역동적 원리로 제시되는 ‘운동’, ‘깊이’, ‘색깔’은 물의 상징과 이미지의 다중적 측면을 설명합니다. 물은 운동의 측면에서 동적인 물과 정적인 물, 깊이의 측면에서 깊은 물과 얕은 물, 색깔의 측면에서 밝은 물과 어두운 물로 구분되어 각각의 의미를 달리 해석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합니다.

이와 같은 탐구를 통해 물이 단순히 물리적 요소가 아닌, 깊고 다층적인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은 생명과 죽음, 치유와 파괴, 안전과 위협을 동시에 담아내며, 이는 인간의 정신과 문화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됩니다.

바슐라르는 물이 지닌 상징성과 그 심리적 의미를 통해, 우리가 단순히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물을 넘어서, 감성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에서 물을 이해하게 합니다. 이는 물이 우리의 삶에 끼치는 깊은 영향을 탐구하게 하며, 건축과 예술에서 물이 어떻게 영감을 제공할 수 있는지에 대한 시각을 제공합니다.


물과 건축의 관계

물과 건축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우리는 공간이 제공하는 단순한 기능적 측면을 넘어서 인간의 감성적, 정서적 만족을 충족시키는 예술적 건축물을 창조할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책, 「물과 건축」은 물을 통해 건축 공간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으며, 물이 건축에서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탐구합니다. 예를 들어, 건축물 외부에 반사된 맑고 깨끗한 물의 이미지는 건축물이 자연과 어우러지며 주변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돕습니다. 물의 흐름과 유동성은 건축물 내부의 구조와 공간 배치에 반영될 수 있어, 사용자들에게 자유롭고 유기적인 공간 경험을 제공합니다.

또한, 물은 우리의 정서적 치유와 심미적 감수성을 촉진하는 요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건축물 내부에 자연적으로 흐르는 물의 요소는 공간에 안정감과 평온을 주며, 사용자들에게 심리적 안정을 제공합니다. 순수를 상징하는 물은 건축물의 디자인에 반영되어 간결하고 우아한 형태의 건축물을 창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장식과 표현의 경계에서 새로운 논의점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 책은 물을 건축공간에 활용하기 위한 공학적, 실용적 차원을 넘어, 물을 매개로 건축이 인간의 존재적 이상과 꿈을 실현하는 중요한 예술적 표현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제안합니다. 물과 건축에 대한 몽상이 우리의 삶과 문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며,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공간 경험을 창출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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