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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피 1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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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피 Oct 20. 2024

여행의 의미

#10

동명은 해가 질 때쯤 카페를 나왔다.

손에는 글씨가 빼곡히 적혀있는 종이가 쥐어져 있었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방금까지 카페 사장과 나눈 이야기를 곱씹었다.


 카페 사장은 동명과 두어 시간 남짓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시간이 정말 짧게 느껴질 만큼

동명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이야깃거리였다.


카페 사장은 동명에게 소재 하나를 주고 그림 하나를 완성해 달라는 제안을 했다. 그 소재는 상당히 세부적으로

짜임새 있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동명은 자신이 찾아오던 그림의 소재를 찾은 것 같은 생각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비록 스스로가 만들어낸 이야기는 아니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을 그려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집에 도착한 동명은 손에 있던 종이를 펼쳐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읽고 또 읽으며 사색에 빠지곤 얼마 지나지 않아 연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탐구하며 그리는 것이 아닌 오로지 동명의 상상에 의존해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림은 수십 번 지워지고 다시 그려지기를 반복했고 며칠이 지난 끝에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동명은 늦은 오후 카페로 달려가 사장에게 그림을 보여주었다.


“ 조금 오래 걸리긴 했지만 완성했어요!”

두 손으로 종이의 양 옆을 잡고 자랑스럽게 펼쳐 든 모습이 카페 사장은 대견했다.

하지만 그림으로만 본다면 사장은 만족스럽지 못했고 조금 더 이야기에 적합한 그림을 그려주길 바랐다.

사장은 동명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다시 그려오기를 부탁했다.


동명은 의외의 반응에 풀이 죽었지만 되려 오기가 생겨 하루종일 그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림에 변화는 있었지만 이야기가 녹아져 있는 그림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림에 정답은 없었기에 도움을 구할 곳 또한 없었다.


동명은 그림을 완성시키지 못한 채 어두운 얼굴을 들고 카페에 다시 찾아갔다.

두 손에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은 동명을 본 사장은 의아한 듯 물었다.


“오늘은 고민이 많아 보이네요. 잘 그려지지가 않으신가요?”

동명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무지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말씀해 주신 이야기는 너무 매력적인데 상상력을 표현하려니까 정말 어렵네요”

사장에게 동명은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면서 좋은 방안을 요구하듯 쳐다보았다.

이에 하는 수 없이 동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저는 가끔 꽉 막힌 세상에 답을 구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요. 너무 멀리 가지 않아도 되고 되도록이면 많이 걷고 생각할 수 있는 곳으로?”

사장은 동명에게 여행을 추천했다. 남는 게 시간인 동명은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


사장의 추천을 받은 지 일주일이 지난 후 동명은 새벽 배에 몸을 실었다.

도착지는 제주도. 가볍게 여행기분을 낼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였다.

배가 도착해 갈 때쯤 해가 뜨기 시작했고 동명은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차 올랐다.


배에서 내린 뒤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예약해 둔 숙소로 체크인을 했다.

숙소 호스트는 동명을 밝게 맞이해 줬다. 밝은 인상의 호스트는 이 숙소의 주인은 아니었다.

숙소에서 일하며 숙식을 제공받고 있는 직원정도 되어 보였다. 여유로운 표정과 행동은 동명의 마음에

안심을 가져다주었다. 숙소 밖 맞은편에는 해안도로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뻗어있었다.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사람이 상당수였다. 출렁이는 파도 소리와 바다 냄새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숲 길은 해안도로를 따라 하루종일 걷는 사람들이 지치지 않는 이유일 것이다. 동명은 해안도로를 따라 걷는 사람들을 보며 카페 사장이 해주었던 말을 되새겼다.


‘되도록이면 많이 걷고 생각할 수 있는 곳으로’


길게 생각할 것 없었다. 동명은 곧장 편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해안도로 쪽으로 나갔다.

해는 동명을 온전히 비추고 있었고 힘차게 달려드는 파도는 짠내 나는 바람을 만들며 동명의 등을 밀어주었다.

거침없이 나아갔고 해안도로를 걷는 많은 사람들은 동명이 길을 잃지 않게 도와주었다. 대책 없이 걷기 시작한 동명은 언제까지 걸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앞의 저 사람들은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제법 걸음이 빠른 동명은 바로 앞사람과의 거리가 어깨너비만큼 가까워졌다. 

동명과 가까워진 앞사람은 동명의 시선을 끌었다. 여자임에도 얼굴 전체를 덮을 만큼 커다란 차양을 갖춘 밀짚모자와 팔에는 살이 타지 않고 시원하게끔 해주는 쿨토시까지 상당히 노련해 보이는 복장이었다. 나이는 어림짐작으로 자신과 비슷할 것이라고 느낀 동명은 어렵지 않게 먼저 말을 꺼냈다.


“저 혹시 목적지가 있으신가요?”

갑자기 옆에서 튀어나온 동명을 보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이내 침착하게 되물었다.


“제가 가고 있는 목적지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실은 제가 오늘 처음 걷기 시작했거든요. 사람들이 다들 해안도로를 따라 걷길래요”

사람들 따라 걷기 시작했다는 말이 스스로 말하면서도 어이가 없던 동명은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여자도 살짝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사람만 따라다니다가는 길을 잃을 거예요”

걷은 사람들은 제각각 목적지가 있는 듯했다. 동명은 그 목적지가 궁금해 여자와 걸음 박자를 맞추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 그럼 뭘 보고 걷는 걸까요? 이 많은 사람들은..”


“끈이요”


“끈? 무슨 끈을 말하는 거죠?”


여자는 두리번거리는 동명의 어깨를 툭 치며 부르더니 팔을 쭉 뻗으며 무언가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킨 것은 앞에 선두로 걷고 있는 사람들 앞 나무에 걸려있는 빨간색 파란색이 엇갈려 있는 끈이었다.


“올레길이라는 거예요. 많은 코스가 있는데 코스당 15킬로미터 정도 되고 저기 보이는 알록달록한 끈을 따라가면서 걷다 보면 완주 스탬프를 찍는 곳이 보일 거예요. 그럼 하나의 코스 정복 완료죠!”

동명은 여자의 친절한 설명에 바로 이해되었고 이제야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들 사이사이에 매달려있는 끈들과 그 끈들의 간격 사이사이로 꾸준히 걷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만 보고 따라가던 동명은 본인이 본질을 잊고 따라가기만 바빴구나 싶었다.


동명은 여자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조금 더 궁금한 부분을 물어봤다. 


“올레길을 걷는 이유는 뭘까요. 다들 저렇게 열심히 걷는 이유가 궁금해요.”

이에 여자는 웃으며 대답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모두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본인이 여기에 오신 이유가 답이 될 것 같네요”


“제가 여기 온 이유와 같다는 말인가요..?”


동명은 여자의 말에 깊은 고뇌에 빠지며 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이에 여자는 ‘저 먼저 가볼게요. 나중에 숲 길에 들어서면 길 잃지 않게 조심하세요’’라고 당부 인사한 뒤 홀연히 제 갈 길을 갔다. 동명의 귀에는 그 인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생각하기 바빴다.


깊은 고뇌의 끝은 카페 사장을 떠올리며 끝이 났고 자신에게 주어진 숙제가 떠오르며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환기하기 위해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어쩌면 새로운 무언가 영감을 얻기 위해 왔을지도 모른다. 여태 눈에 보이던 것들을 복사하듯 그려온 동명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것을 그려낸다는 것은 낯선 일이었다. 자신도 없었고 사장에게 실망을 안겨줄까 걱정도 되었다. 

낯선 일을 위해 낯선 환경에 자신을 내던졌다. 바람에 아름답게 춤추며 사람들을 인도하는 끈. 그 끈을 따라 정처 없이 걷기 시작하는 사람들.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그들은 어떤 위로를 혹은 영감을 얻고 있을까. 동명은 자신도 모르게 눈에 보이는 끈을 다라 걷고 있었고 생각은 거미줄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으며 지속되었다.


그러다 문득 끈의 매력에 매료되었다.  

끈은 동명에게 나아가야 하는 길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해 주었다. 단지, 자신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 무언가에 대해서 깊이 고심하고 고뇌하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오로지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걸 좋아하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했다. 


동명의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깊어져가고 있을 때쯤 동명의 시야에는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온통 주변은 나무와 풀들로 숲 길에 들어서있었다. 그와 동시에 동명은 머리가 번뜩이며 좋은 아이디어라도 얻은 것 마냥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에 서서 숲 길 입구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은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끈이 보이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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