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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수피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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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피 Oct 17. 2024

만남

#9

사각.. 사각

각 진 연필이 날카로운 커터칼에 결 따라 잘려나가고 있다.

엄지로 받쳐 조심스럽고 부드럽게 자르는 게 한두 번 해본 솜씨는 아니다.


잘려 나가는 나무 조각의 크기는 일정했지만 흑심이 갈려나가는 것은 미리 깔아 둔 휴지조각으로도 받아낼 수 없었다. 카페에서 그림 그리기 위해 연필을 다듬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동명은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카페 사장은 동명의 그림을 좋아했다. 별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지만 한가할 땐 동명의 그림에 집중하는 눈치였다. 동명의 연필 움직임이 둔해질 때쯤이면 사장은 어떤 그림인지 묻곤 했다. 이제 동명이 카페에서 그림 그리는 것은 당연한 일과였다. 


보통은 사람을 그렸는데 사진을 따라 그리는 것보다는 눈앞에 보이는 사람을 줄 곧 그려왔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그림은 카페 내부가 배경이었다. 그래서 카페 사장은 더 흥미를 가졌고 좋아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늘도 어김없이 길쭉한 바 자리를 선점한 후 연필을 깎기 시작했고 카페는 한가해 사장의 관심을 받을 수 있었다.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리실 건가요?”

동명이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 들어왔다.


“벽 쪽에 붙어있는 스탠딩 테이블 고객을 그려보려고 준비 중이에요”

높은 테이블과 높은 의자 그리고 무채색의 벽지가 앉아있는 사람이 동명의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그림 그리기에 좋은 조건을 만족시키고 있었다.

동명은 조심스럽게 그 고객을 어떻게 그릴지 분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분석을 모두 끝낸 동명은 잘 다듬어진 연필을 들고 노트 바로 위 허공에 선을 긋는 동작을 반복했다. 허공을 가르던 동작은 곧 종이와 맞닿기 시작했다. 종이에 그림이 그려지는 소리가 귀를 자극한다. 

대충 보면 아무렇게나 선을 긋는 듯싶으나 점점 선들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형태는 입체감을 형성했고 곧이어 동명의 노트에는 살아 움직이는 듯한 정교한 그림이 완성되어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사진을 인화한 것 같아요..!”

언제나 그렇듯 동명의 그림을 본 사장은 진심으로 놀라며 연달아 감탄했다.

오늘은 평소보다 매장이 더욱 한가 했기에 사장은 동명의 그림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곤 머뭇거리던 사장의 입술에서 참아왔던 말을 내뱉었다.


“손님은 하고 싶은 게 정말 확실하신 것 같아요. 요즘은 하고 싶은 걸 찾지 못하는 분들이 참 많잖아요.”

사장은 동명을 보며 그림 외에도 무언가 열정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동명 그 자체에 감동을 받은 듯했다. 그리고 사뭇 진지한 분위기로 말을 이어갔다.


“그림을 그리는 데 뚜렷한 목표가 있을까요? 항상 궁금했어요. 어떤 목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지..”


동명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다가 곧바로 대답을 했다.


“저만의 그림을 그려보는 게 꿈이에요”

자신만의 그림이라. 사장은 동명이 방금 그려낸 그림도 동명만의 그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명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고 동명의 이어진 말에 그 이유가 있었다.


“무언가를 보고 그리는 게 아니고 내 상상에서 만들어낸 것들 말이죠. 보이는 걸 그려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요.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상상해 낸 무언가는 정말 어려워요. 그것만의 이야기도 필요하기도 하고 정체성도 필요하죠. 저는 그런 멋진 저만의 그림을 그려내고 싶어요”


동명은 역시 확고했다. 해답을 찾지 못했을 뿐 자신이 원하는 목표는 뚜렷했다. 보이는 것 말고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내고 싶은 동명의 욕망을 사장은 이해하는 듯했다. 그리고 이런 동명의 대답은 사장이 원하는 대답이었다는 듯 입가에 미소가 띠어져 있었다. 


“손님이라면 손님만의 그림을 그려낼 실력은 충분해요. 하지만, 이야기가 부족한 거죠. 이야기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제가 카페를 열게 된 것처럼요.”


“맞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아직 경험이 부족하기에 이야기가 없는 것 같아요. 자꾸 스스로에게 되묻다 보면 결국 그 경험을 위해 제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혼란이 오더라고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던 동명은 진지한 표정으로 연필을 내려놓고 고뇌에 빠졌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많은 경험들은 어디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머리가 조여왔다. 마냥 그림이 좋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아온 동명은 앞으로도 쭉 이렇게 그림을 그려오면 인정받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나이가 차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 만으로는 한계에 다다랐고 자신만의 그림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쉽사리 그려지지 않았다. 나 자신을 표현하고 사람들도 이해시킬 수 있는 그런 그림. 


고뇌하고 있던 동명의 복잡한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와 깨부수는 사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내하고 인내하다 보면 운과 맞닥뜨리는 순간이 오나 봐요. 손님과 제가 만난 것처럼요. 제가 손님에게 좋은 경험을 선물해드리고 싶은데 제 이야기 한번 들어보실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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