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오카 여행 1일차
여행은 늘 피곤함과 함께 시작된다. 오늘도 그랬다. 새벽 4시 30분. 아침해가 뜨기도 전에 우리의 여행은 시작됐다.
비가 내렸다. 우르르까지는 아니더라도 제법 쏟아지는 비였는데, 때문에 김해 공항으로 가는 차는 온통 젖어있었다. 친구의 차 뒷자석에 타 멍하니 차창을 봤다. 제법 빠른 속도 탓에 비가 창에 점을 찍더니, 위쪽으로 타고 올랐다. 하나 둘 제빠르게 움직이는 모양새. 점점이 모인 물방울들. 그게 어딘가 꺼림직했다. 덜 자란 물고기들이 징그러운 입을 뻐끔거리는 것 같기도 했고, 미꾸라지들이 그 미끄러움을 자랑하며 차를 뒤덮은 것 같기도 했다. 미꾸라지로 뒤덮인 차라니, 징그럽지 않은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우리는 김해공항에 도착했다.
친구의 기내 반입 가방에 있던 액체류가 걸린 것을 제외하면 부드러운 수속 과정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티켓을 끊고, 비행기에 오르면서도 놀러간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피곤했던 듯하다. 설렘이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다니, 나도 그저 그런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어쩐지 서글퍼진다.
일본에 도착한 후 숙소에 짐을 두고 곧장 도시로 나왔다. 알아둔 전통 있는 카페를 가기 위함이었는데 가는 길에 거대한 강이 있었다. 나카스강이라는 이름의, 바다를 닮은 강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그 탁한 색이, 마침 내리는 소소한 빗줄기가 넋을 놓게 했다. 진흙빛 강물이 이리 예쁠 수 있을까. 이 광대한 물줄기가 고요한 세상과 만나 적막의 공간을 만든다. 바닥에 고인 빗물과 일본식 자동차가 쏘는 노란빛, 웅덩이에 비친 빛줄기의 일렁임. 사진 속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었다.
강 너머 즐비한 건물 하나는 조명이 깜박이고 있다. 다 떳떳히 계속해서 빛을 내는데, 그 하나만 자꾸만 제 빛을 잃었다 되찾았다 한다.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누구를 부르고 있는 걸까. 괜히 애틋해져 하염없이 그곳을 바라본다.
찾아간 카페는 문을 닫았다. 아쉬움은 적었다. 아직 여행 일정이 많이 남기도 했고, 애초에 여러 곳을 둘러보고 싶었던 탓이다.
우리는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마침 지나오는 길에 열린 카페를 확인했기에 과정은 수월했다. 2층으로 구성된 카페는 아늑했다. 1층은 주문만 받는 곳으로, 다소 시니컬한 사장님이 계셨는데 전화를 받으며 주문을 받거나 돈을 한 손으로 넘겨주는 등 그 시니컬함이 당혹스러울 정도였다.
주문 후 2층에 올라서자 창가에 늘어선 좌석과 따로 떨어진 테이블이 두 개 있었다. 창가로는 나카스강이 보였다. 내리는 비가 강을 적시고, 강에 튕겨져 올랐다 다시 강과 하나가 되었다. 강 옆으로는 차와 사람들이 질서정연하게 돌아다니고, 비 따위 아랑곳 않는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나카스강은 빈말로라도 맑다 할 수 없다. 어찌 보면 더럽기 그지 없는 그곳이, 어두워서 더 마음을 사로잡는다. 머리 위에서 회전하는 나무재질의 실링팬과 좌측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느낌의 음악까지 더해져 묘하게 차분해졌다.
카페를 나와 다시 길을 거닐었다. 거세지는 빗줄기에 우산이 뚫린 것인지 우산을 썼음에도 머리가 추적추적 젖어갔다. 팔을 타고 흐르는 빗물과 푹 젖은 바지 하단, 색이 진해진 샌들까지. 우리는 점차 비와 하나가 되어 갔다. 애인은 엉덩이가 있는 편인데 얼마나 업 되어있는지, 엉덩이 부분만 젖어있어 큰 웃음을 줬다.
비라는 건 참 신기하다. 새옷을 입고 젖기 싫어 주춤일 때면 그렇게 싫은 게 또 없는데, 하나둘 스며드는 비를 받아들이며 축축함을 받아들이면 어느새 우렁차게 바닥을 치는 빗소리와 몸을 적시며 흐르는 물기가 기껍게 느껴진다. 기꺼이 젖고자할 때, 비는 즐거움이 된다. 꼭 인생같지 않은가. 참으로 낭만적이지 않은가.
비에 취해 이끌리듯 도착한 곳은 애인이 이전에 방문한 적 있는 라멘집이었다. 오래된 국밥집 냄새가 나는 라멘집은 마찬가지로 자그마했다. 주방이 훤히 보이는 구조에 기세 좋은 할머니가 주문을 받고 다녔는데, 한국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곳이라 보다 더 일본 특유의 느낌이 살아있었다.
라멘은, 기가 막혔다. 묵직하고 구수한게 우리나라의 국밥을 다른 버전으로 나타낸 것 같았다. 얇은 면은 꼬들하고 간이 잘 배어있어 국물 없이 면만 먹어도 맛났다. 라멘에 들어있는 고기는 일반 라멘 고기라고는 믿을 수 없이 부드럽고 짭쪼름했는데, 면을 먹다 고기를 한 입 베어 무는 게 환상적이었다.
짭쪼름한 걸 먹었으니 다음은 달달한 걸 먹어야지! 이어서 향한 곳은 눈여겨 봤던 카페. 빗속을 헤쳐 도달한 곳의 롤케이크의 맛이란. 부드럽고 달콤하면서 고소한 크림과 쫀득한 빵이 어우러져 벌어지는 향연. 턱쪽이 아리듯 새콤하고 그 위 감칠맛과 단맛이 혀를 감싼다. 혀 구석구석, 입안 샅샅이 퍼지는 향과 맛이 조화를 이룬다. 굉장한 현상이었다. 입 안에 머금고 있는 것만으로도 황홀해지는 맛. 마음 같아선 박스 묶음으로 사들고 가고픈 걸 억누르며 한입, 한입 먹는 맛이 있었다.
예술적인 롤케이크 후에는 숙소에 들어갔다. 옷이 잔뜩 젖어 갈아입기 위함이었다. 애인과 나는 933호, 친구는 916호를 배정받아 잠시 헤어졌다.
숙소는 캐넬 시티에 있는 곳이었다. 배정받은 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좁은 통로가 나왔다. 한 사람이 지나갈 정도로 좁은 통로였다. 몇발자국 안으로 들어가면 좌측에 티비가, 우측에 침대가 있는데 티비에서 침대 사이의 거리가 한 걸음이 채 되지 않았다. 앞서 식당들이 그랬듯 작은 방이었다. 재밌는 점이, 변기와 세면대가 다닥 붙은 좁은 화장실에도 욕조가 있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얼마나 목욕을 좋아하는가! 그들의 목욕에 대한 열의가 짱구 극장판 온천 부글부글 대작전을 떠올리게 했다.
우리는 잠시 숙소의 안락함에 취해 밍기적거렸다. 약속된 휴식시간은 30분. 옷을 갈아입고 잠시 누웠다 일어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후로는 거센 비로 인해 근방의 쇼핑센터를 돌았다. 그중 애인에게서 비녀를 선물 받았는데 영롱한 푸른빛에 벚꽃이 네 송이 그려진 동그란 장식이 있는 것이 참 어여뻤다. 직원의 도움을 받아 반쯤 흘러내리게 비녀를 꼽자 꼭 옛 선인의 차림 같아 머쓱하면서도 좋았다.
비녀같이 옛 것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보면 이상하게 시선이 간다. 과거에 얽매이는 성미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때문에 옛것들이 더 많이 활용되고 소비되면 하고 바란다. 비녀도 그렇고 한복도 그렇다.
서로 엇갈린 앞섬과 아래로 곱게 뻗은 소매깃, 풍성하게 퍼지는 치맛자락의 아름다움을 안다. 긴 머리를 틀어올려 찰랑이는 비녀를 꽂고 걸음을 옮길 때면 울리는 청량한 소리를 안다. 햇빛이 투명한 천 너머로 비치우는, 아련한 아름다움. 우리의 전통 의복이 그것과 닮아있음을 안다. 그 어여쁨이 너무도 크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알았으면, 더 봐줬으면 하는 듯하다.
각설하고. 예쁜 선물을 받은 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쇼핑을 이어갔다. 지브리 굿즈샵부터 포켓몬, 하이큐, 쿠로바스, 주술회전 등등의 온갖 굿즈샵들을 돌았다. 단다단의 터보 할멈을 보며 기뻐하고, 세레파 성인의 가면에 갈등하며 따라큐 굿즈가 매진인 것에 슬퍼했다. 건물 안에서도 울리는 천둥소리는 즐거움을 가미했다.
꼭 풍물놀이 속 댄서가 된 기분이었다. 우렁차게 울리는 천둥과 매섭게 내리치는 비, 서럽게 부는 바람 사이로 발걸음을 옮기고, 손을 뻗는다. 고개를 들었다가 뒤로 돈다.
오늘은, 그렇다.
물의 날이었다. 끝없이 흐르는 빗속에서 추는 춤이 딱 오늘같지 않을까.
내 일생 첫 일본의 시작은 비로부터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