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번의 삶>을 읽고
"감정에 설득력이 없어요."
학교에서 진행하는 글쓰기 프로젝트를 하는 내내 들은 피드백이다. 벌써 세 번째 백(back)이었다.
방학을 맞이하며 나는 몇몇개의 활동을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글쓰기 프로젝트'인데, 여러 학생들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내는 프로젝트이다. 일정한 분량의 단편을 기간 내에 써야한다는 중압감 때문일까. 글은 잘 써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소설을 썼다. 강아지를 모티브로 한 소설로, 강아지와 한 소녀가 함께 성장하는 이야기였으나 작중 내 시간범위가 너무 길다는 피드백으로 이야기를 바꾸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소설은 딱히 떠오르지 않아 에세이로 노선을 바꾸었다. 고등학생 시절의 이야기였다. 그때의 경험과 감정, 생각을 풀어낸 글을 썼다. 에세이니 개연성으로 혼나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며 원고를 제출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선생님은 사건에 대한 감정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그 피드백이 이해되지 않았다. 에세이, 즉 독자가 읽는 글이니 그들이 이해할 수 있게 써야 한다는 건 알겠지만, 감정 간의 관계에 설득력이 없다는 게 당혹스러웠다. 내가 그렇게 느꼈는데, 그게 내 생각의 전부인데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과장하라는 게, 이게 에세이가 맞나, 싶었다.
2차 피드백을 받고 곰곰이 생각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애초에 에세이란 무엇이지. 다른 에세이는 어떨까. 그러다 문득, 이제껏 에세이를 '끝까지' 읽은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꽤 산만한 사람이라 끝까지 무언가를 진득하게 하지 못한다. 하나의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해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고, 그러다 앞서 읽던 것의 내용을 잊어버려 읽기를 중단하곤 한다. 때문에 매년 펼치는 책은 몇 십권인데 닫는 책은 고작 5권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다보니 당연하게도 잔잔한 류의 글인 에세이는 끝까지 본 게 한 손에 꼽을 만큼이다.
아, 이게 문제였구나. 에세이를 끝까지 본 적도, 에세이에 대해 고민한 적도 별로 없으면서 에세이를 쓰겠다고 나서고 있으니 제대로 써질 리가 없지.
깨달음을 얻은 직후 내가 한 행동은 에세이를 '읽는 것'었다. 마침 독서 모임에서 만난 분이 재밌는 에세이를 소개하시길래, 이거다 싶어 바로 그 책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선정된 게 바로 김영하 작가님의 <단 한 번의 삶>이다.
다행히도 책을 읽으며 고민에 대한 답을 얼추 찾을 수 있었다. 가장 먼저 실마리를 준 구절을 소개하며 생각을 풀어낼까 한다.
인생은 중간에 보게 된 영화와 비슷한 데가 있다. 처음에는 인물도 낯설고, 상황도 이해할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 그럭저럭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갈등이 고조되고 클라이맥스로 치닫지만 저들이 왜 저렇게 행동하는지, 무슨 이유로 저런 일들이 일어나는지 명확히 이해하기 어렵고, 영원히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무겁게 남아 있는 채로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바로 그런 상태로 우리는 닥쳐오는 인생의 무수한 이벤트를 겪어나가야 하고 그리하여 삶은 죽음이 찾아오는 그 순간까지도 부조리로 남아 있게 된다.
-단 한 번의 삶 중-
내가 좋아하는 언어는 문학의 언어였다. 그 언어는 모호하다. 이것을 말하면서 동시에 저것을 말하고, 저것을 말하면서 이것을 말한다. 때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언어이며, 사람에 따라 무한히 다르게 해석된다.
... 문학은 그래도 된다. 그래서 좋았다.
-단 한 번의 삶 중-
나는 모르는 게 많다. 너무도 많다. 심지어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도 알지 못한다. 사고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조차 내가 말하고픈 바를 모르겠는데 독자가 어떻게 알겠는가. 피드백을 준 사람들의 말대로 나는 명료함이 부족하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내가 바로 그 모호함을 바랐다는 것이다. 명료함이라는 이름의 편견과 아집이 얼마나 추잡한지 알아서, 그렇게 되는 게 무서워 모호함으로 남기로 했다. 이도저도 아닌 것이 아집덩어리의 고집쟁이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반골에 겁쟁이인 것이다. 세상을 알기 위해서, 자신을 세우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명제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반론하거나 수용하면서 삶의 태도를 정하고 나아간다. 이 과정의 가장 슬픈 점은, 어느순간부터 사람들이 반론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임의의 명제가 영원불변한 진리로서 그들의 마음속에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게 무서워, 아무런 명제도 세우지 않기로 한 듯하다. 전부를 수용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인 후에 가장 아름다운 진리를 찾으리라는 오만도 함께 했다.
나는 나를 정의하지 못했다. 때문에 나를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내가 나를 모르기에 나를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이를 인정하자 무엇을 해야할 지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날 마주해야 한다. 진부하지만 그것부터. 자신을 관조하고, 또 격렬히 느낌으로써 이야기는 시작되리라.
그런데 이와는 별개로 선생님의 피드백에는 납득이 가지 않는 게 많다. 우선 피드백에 나왔던 '극적인 사건'을 만들라는 게 그러하다. 이와 관련하여 도서의 구절을 인용하고자 한다.
현실에서는 '사람 절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극장에 들어가 관객이 되면 인물의 변화를 기다리고, 그 인물이 시작과는 크게 달라졌을 때에도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인다. 우리가 현실 공간에서는 애써 눈감고 있는 어떤 진실, 나도 변하고, 너도 변하고, 우리 모두 시시각각 다른 존재로 변화하고, 그에 따라 관계의 성질도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라는 안전한 공간에서 수용한다.
... 그런데 인물의 변화를 주로 이야기를 통해 접하다보니 어느새 많은 이들이 인간의 의미 있는 변화는 오직 큰 사건을 통해서만 일어난다고 믿게 된 것 같다.
... 우주의 만물이 그러하고, 내가 그러했듯, 그럴듯한 이유 없이도 인간은 얼마든지 변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오히려 변화보다 더 어려운 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이니 이 자연스러운 결과에 굳이 '도발적 사건'을 갖다붙여 설명할 필요는 없다. 모든 지도에 축척이 있듯이 실제 세계는 이야기의 세계를 초과한다. 다만 이해가 잘 되지 않을 뿐.
-단 한 번의 삶 중-
소설에는 극적인 사건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가능하니까. 그러나 인생을 담는 에세이는, 사실 평탄하다. 우리는 사소한 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를 풀어낼 뿐이다. 무언가 어마어마한 사건을 다루는 것이 에세이라면 과연 에세이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에세이는 비교적 산개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삶은 명료한 인과관계로 이어지지 않으며, 설령 그렇다할지라도 그걸 알아차리긴 힘드니까. 어렴풋한 기억들, 강렬한 감정과 다소 연계성 없어 보이는 생각들. 그러한 것들이 섞여 하나의 노래를 만들 때, 그것이 에세이이고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하나로 이어져 일맥상통한 이야기로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는 글을 에세이라 할 수 있을까. 글쎄. 누군가에게는 그렇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아니다.
이 작품을 통해 그 생각은 더욱 뚜렷해졌다.
사실, 글쓰기 프로젝트를 하며 많이 낙담했다. 지나치게 많은 부정적 피드백과 예상치 못한 감정에 대한 나무람. 여러 요인이 종합해 날 괴롭혔다. 어느순간부터는 글쓰기가 지긋지긋 해졌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는 게 지독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목도한 말이 있었다.
"제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럴 때면 나는 그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물었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계속 쓰면 되고, 되고 싶지 않으면 안 쓰면 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삶 중-
순간, 묵직한 것이 내리찍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얼 위해 글을 쓰나. '나'를 위해 쓴다. 글쓰기 프로젝트도, 그저 내 책을 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도전한 것이지, 엄청난 작가가 되거나 굉장한 작품을 내리라 생각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글쓰는 게 즐겁다. 글을 쓰기 위해 여러 사람, 영화, 도서를 보다 깊게 들여다보며 고민하는 과정이 즐겁고, 어떻게든 발견해낸 의미를, 커피향 가득한 카페에서 써내려가는 것이 즐겁다. 소재가 될까 싶어 이것저것 필기하고, 글을 올리는 게 재밌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나는 꼭 희대의 명작, 혹은 인생 마지막 작품을 쓰는 것마냥 굴고 있었다. 이건 그저 긴 글쓰기 인생의 일부일 뿐인데. 명료함에 대한 깨우침이면 충분한 조언인데. 과도하게 주눅들어 있었다.
그걸 깨닫자 글이 써지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부터 그리 잘났었다고.
그냥 쓰자. 즐기자. 고민하자.
그거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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