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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의 실종

영화 <가타카>를 보고

by 하난

빈센트는 드물게 자연잉태로 태어난 아이였다. 작은 키에 왜소한 몸, 낮은 시력에 99%의 심장병 발병가능성을 지닌 아이. 한참 뒤에 태어난 동생에게 운동에서도, 몸집에서도 모두 지는 ‘열등한’ 인간. 그게 빈센트였다.
빈센트가 태어난 것은 다소 가까운 미래의 일이다. 인체공학이 발전하여 피 한줌으로 그 사람의 생애를 예측할 수 있는 미래. 수정임신이 디폴트 상태에, 유전적 요인으로 열등과 우등이 갈리는 극적인 세상이다. 오롯이 과학에 의존한 세상에서 빈센트의 부모는 낭만을, 사랑을 찾았고 자연스러운 형태의 아이를 원했다. 그러나 그들의 로망과 달리 빈센트의 나날은 처절했다. 약한 몸 탓에 보험에 들 수도 없었으며, 넘어질까 긍긍하는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어린 동생에게 키를 추월당하고, 수영 시합을 할 때면 늘 졌다. 우주 비행사라는 꿈은 그의 신체적 결함으로 인해 좌절되고 그토록 원하는 항공사에서는 청소부로 살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행운이 찾아온 건 한순간이었다. 아니, 오래도록 바라온 결실이었다. 9.3점의 우성으로 태어난 제롬은 교통사고로 하반신 불구가 되었다. 그는 만년 2등 수영선수에 머물렀던 자신의 현실에 슬퍼하며 자신 대신 ‘제롬’으로서 꿈을 이루어줄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빈센트는, ‘제롬’이 된다. 제롬이 되자 취직은 쉬웠다. 사람들의 대우도 달라졌다. 변한 것이라고는 행색 정도에 불과했는데 너무도 많은 것이 바뀌었다.
제롬은 매일 매서운 볼로 자신의 몸을 긁어냈다. 각질이 떨어져 빈센트가 발각되는 것을 두려워한 탓이다. 제롬은 매일 자신의 소변과 피를 추출했다. 항공사에 입장하기 위해서는 출근할 때마다 소량의 혈액을 채취해야 했고, 때때로 그들은 갑작스런 소변 채취까지 감행했던 탓이다. 제롬과 빈센트의 나날은, 그렇게 잔인하게 평범했다.
그들의 일상이 흔들린 것은 한 감독관의 사망으로 인해서였다. 빈센트 항공사의 감독관이 살해당했던 탓에 항공사 내부에 대대적인 조사가 감행된 것이다. 형사들은 계속해서 주둔해 범인을 물색했고, 부적격자인 빈센트의 눈썹을 발견했다. 빈센트는 이제, 살인 용의자였다.

영화 <가타카>는 기본적으로 고요하고 차분하다. sf영화임에도 불구하고 sf 특유의 광오함 대신 절제와 고통을 담는다. 영화는 찬찬히 과학의 비극을 비춘다.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지어지는 이들과, 과학에 대한 맹신, 운명에 대한 광신, 그로 인한 압박감, 기회의 박탈. 우성과 열성은 저마다의 고통으로 죽어간다. 빈센트가 꿈을 뺏겨 괴로워했다면, 제롬은 꿈을 강제당해 고통에 몸부림쳤다. 과학은 절대적이지도 않았다. 폭력성이 검출되지 않은 항공사의 관리자는 자신의 소망을 위해 감독관을 살해한 반면, 폭력성이 높게 검출된 빈센트는 극중 단한번의 폭력을 보여줬을 뿐이다. 인공수정으로 태어난 빈센트의 부모와 제롬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나, 우울증 가능성이 높았던 빈센트는 끝까지 살아남아 저의 꿈을 이룬다.
가타나는 과학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완벽하지 않고, 그것을 창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과학 만능주의에서 벗어나고는 있다지만, 여전히 툭하면 ‘객관적인, 논리적인, 과학적인’ 근거를 가져오라며 떠들어대는 현대 사회에, 무엇보다 중요한 교훈이다. 완전한 완벽은 없다. 논리도 그저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는 ‘그럴 듯함’에 불과하고, 객관적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말대로- 가장 깊이 내린 주관에 불과하다. 과학적이라는 것은 일종의 맹신이다. 과학 또한 우리가 본 것을 토대로 파악되고, 우리는 정확히 보는 것조차 할 수 없는 생물들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도 정확하고 명료하며 완전한가. 완전한 객관은 우리의 믿음 속에나 존재할 뿐이다.

가타나는 일종의 디스토피아다. 인간을 제멋대로 만들어내고 우생학적 사고가 전적으로 타당한 사고로 여겨지며, 다양성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세상이 디스토피아가 아니면 무엇이 디스토피아일까. 때문에 영화는 전체적으로 암울하고 쓸쓸하다. 그중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끝내 빈센트는 제롬으로 꿈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제롬은 빈센트가 평생 쓸만큼의 혈액과 소변을 채취해 보관함으로써 빈센트를 응원했고, 빈센트와 같은 부적격자를 자녀로 둔 한 의사는 빈센트의 기록을 위조함으로써 빈센트가 꿈을 이루길 바랐다. 사실 빈센트의 동생이었던 형사도 빈센트를 묵과함으로써 빈센트를 도왔다. 그런데, 그런 선의와 애정에도 불구하고 끝내 빈센트는 세상에서 빈센트로 남을 수 없었다. 그게 못내 슬펐다. 위장하지 않으면, 누군가로 꾸며지지 않는다면 인정받을 수 없는 세상.

영화는 빈센트가 꿈을 이루며 긍정적으로 끝나는 것 같지만, 동시에 빈센트는 ‘제롬’으로 기억되고 제롬은 홀로 목숨을 끊는 비극을 보여준다. 꼭 꿈이라는 건, 희생을 수반하고, 완벽히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같지 않은가. 때문에 기쁘면서도 한숨이 난다. 이 이야기가 어렴풋한 행복 속에 있는 당신도 영화의 결말같은 삶의 과정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 기쁘고, 끝내 네가 바라는 온전한 행복은 쟁취할 수 없을 것이라 저주하는 것 같아 서글프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삶과 죽음, 과학과 자연, 운명과 의지 모든 것에 대한 불완전성과 불가분성을 논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에서 또 하나 눈에 들어왔던 것은 빈센트가 그의 동생과 늘 겨루었던 것도, 제롬이 은메달을 딴 것도 모두 수영이라는 점이다. 제롬은 자신의 은메달을 목에 걸고 죽는데, 이때 은메달에는 두 사람이 함께 수영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꼭 빈센트와 동생이 함께 수영을 했던 것처럼.
빈센트는 늘 동생에게 졌지만 단 한번, 아니, 결말까지 가서 단 두 번 승리한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수영이었다. 위험하다며 돌아가자는 동생에게 빈센트는 “내가 널 이길 수 있는 이유는, 나는 돌아갈 힘을 남겨두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빈센트의 삶은 수영과 같았다. 때로는 몸을 감싸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내 숨을 앗아가는 거친 물결을 가로질러야 하는 바다 수영 같았다. 제롬에 의해 부여받은, 혹은 그 자신에 의해 쟁취한 두 번째 삶에서 빈센트는 제롬과 함께 수영했다. 그리고 빈센트가 처음 동생에게 이겼을 적처럼, 빈센트는 앞으로 계속해서 헤엄친 반면 제롬은 돌아갔다. 태초의 곳으로.
빈센트가 동생을 이겼을 때, 동생은 기쁨 속에서 물에 가라앉고 있는 빈센트를 건져내 구조한다. 이는 제롬의 마지막과 겹쳐진다. 돌아간 것은 제롬이지만, 빈센트가 나아감에도 살아갈 수 있도록 생을 불어넣은 것은 제롬이다.
빈센트의 삶은 그렇게 이중적이다. 누구보다 강한 의지로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갔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강렬한 도움 속에서 이어졌다. 빈센트는 온전히 홀로 선 것이 아니다. 감독관의 사망에도 불구하고 슬퍼하는 이 하나 없던 세상에서, 여러 손길 속에 저의 꿈을 이룬 것이다.

가타카는 이토록 잔인하게 다정하다. 계속해서 비극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무너진 세상에서도 다정이 살아있음을, 애정이 연속됨을 보여준다.

단 하나, 가타카를 보며 아쉬웠던 점은, 나의 안면인식능력이 뛰어나지 못해 얼굴을 식별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비슷한 생김새의 배우가 많아 계속해서 ‘저 사람은 누구지?’,‘아까 나왔잖아’, ‘어라, 왜 두명이 됐지’ 등의 생각에 사로잡혀 놓친 곳이 많다는 게 퍽 아쉽다.

뭐, 기회는 한 번만 있는 게 아니니까. 다음에 또 보고 그때의 감상을 남기려 한다.
이 영화를, sf는 싫은데 sf영화가 보고 싶은 모든 분들에게 추천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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