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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미화 Oct 02. 2024

인생의 범위는 열린구간이지

무한대 극한을 향한 첫걸음

 첫째 아이는 말이 느렸다. 그저 때가 되면 말문이 터지겠지 하며 발화를 도와주고 기다려주는 게 다였다. 보채지 않았다. 말이 느렸을 뿐이지, 눈빛과 행동은 기민하고 감정도 예민하게 잘 알아채는 아이였다. 말을 못 했지 자기 의사표현은 확실하게 하는, 그래서 원하는 것을 기어이 얻어내는 아이였다. 어느 순간 예고 없이 말을 내뱉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기관(어린이집)에 가기 전까지 일명 ‘단어 치기’로 의사소통의 모든 것을 해결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일까.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존재가 첫째였다. 책도 많이 읽어주고 말도 많이 시켜주고 나름 노력은 했지만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영유아 검진은 언제나 ‘언어추적검사 요망’으로 나왔다.   

   

“엄마가 말을 좀 많이 해야 해!”

“귀찮아도 엄마가 잘 놀아줘야 해!”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엄마가 노력해야지.”

“엄마가 애한테 말을 잘 안 하는구나?”

“언어 치료받아봐야 하는 거 아니야?”   

  

 선의라도 선을 넘는 걱정과 관심은 불편하게 만든다는 걸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무시할 수 있었다. 노력의 정도에 관계없이 아이의 발달상태에 따른 결괏값은 ‘엄마 탓’이라 치부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첫째 아이는 다섯 살이 되고 점점 입 근육이 풀리는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하루하루 확장되는 아이의 언어를 듣고 있자니 신기했다. 마음속에 있던 어떤 버튼이 눌러져 언어가 가득 담긴 방의 방문이 열려 버린 듯했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말을 가슴에 담고 있었는지 신기했다. 한편으로는 ‘역시 우리가 하는 말을 다 듣고 있었구나’, ‘하나하나 주워 담아 자신의 언어의 방안에다 차곡차곡 쌓아놓고 정리하고 있었구나’ 싶었다. 다른 부모들은 이미 겪었을 그 신기하고 감동적인 경험을 나는 조금 늦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저절로 큰다', '괜찮다' 생각했던 것들에 제동이 걸리면  불안한 마음이 작동하여 여기저기 마음을 들쑤시고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초조하고 조급한 마음도 불안을 따라 마음을 헤집어 놓기도 했다.      


 언어발달 속도가 남다르다는 걸 알고 난 후, 철저히 첫째의 발달 속도에 맞춰야 했다. 한글공부는 7세에 시작했다. 이미 한글을 떼고 책을 읽고 있는 아이도 많았다. 어느 집 아이들은 다섯 살에 한글을 쓴다더라. 누구는 손가락으로 글을 짚어가며 읽는다더라. 누구는 ‘엄마 아빠 사랑해요’라는 편지도 받았다더라. 심지어 영어도 읽고 쓴다더라. 다른 세상 이야기였다. 귀를 막고 눈을 가려도 비교되는 또래 친구들의 성장이 의식되었다. 발달의 ‘정상범주’라는 말이 유난히 신경 쓰였다. 내가 불안해하고 조급해 한들 아이를 다그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이의 입에서 첫 말이 터지듯, 그냥 아이의 속도에 맞추며 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코로나가 터진 후 가정보육을 시작하고 다른 아이와 비교할 수 없는 환경에 놓인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매일 책 읽어주기.

매일 한 장 한글 쓰기 연습.

매일 소리 내어 읽기.


 그렇게 한 두 달 지나니, 아이는 모음과 자음을 붙여 읽어냈으며 나름대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책도 스스로 소리 내어 읽고, 말도 안 되는 문장이지만 삐뚤빼뚤 글씨로 편지도 쓰고, 장난감 블록의 설명서도, 종이 접기의 순서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터넷 검색창에 알고 싶은 것을 입력해서 스스로 찾아보는 것에도 굉장한 희열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알아가는 기쁨을 느낀 아이의 눈이 어떻게 빛나는지 그때 확실히 보았다.      


 엄마의 욕심이 자라는 순간이 왔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책도 읽고 짧게나마 글도 쓰고 하니, 제대로 문장을 썼으면 하는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더욱이 인스타 게시물에 올라오는 또래 아이들의 ‘잘 쓴 글’을 보며 욕심은  덩치를 키우기 시작했다. 일기를 쓰자고 했다. 아이는 며칠 쓰다 지우고 쓰고를 반복했다. 어느 날 저녁, 일기를 쓰자는 말에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엄마, 내 글이 별로야?”     


 ‘나는 오늘’로 시작한 일기는 언제나 ‘참 재미있었다’로 끝이 났다. 별로라고 말한 적이 없었지만, ‘이렇게 적으면 더 좋은 표현이다.’‘여기 글자는 이렇게 써야 된다.’‘사실보다 느낌을 적으면 더 멋진 글이 될 거다.’라는 조언 아닌 지적을 했었다. 시무룩해진 아이는 입을 삐죽거렸다. 첫째 아이에게 하나하나 상처를 내는 말이 된 것 같았다.      


“엄마, 사실은 내가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들은 많은데, 그걸 종이에 적으려니까 어려워. 못하겠어. 뭐부터 적어야 되는지 잘 모르겠단 말이야. 나도 글 잘 쓰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네발 자전거의 보조바퀴를 뗀 아이에게 속도 내어 달려라고 말하고 있었으니. 아이가 생각을 못해서 글을 못쓰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이의 머릿속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다. ‘엄마, 이것 봐. 저것 봐. 이건 어때. 저건 어때’라고 하루종일 옆에서 종알거리며 이야기를 풀어놓는 아이였으니. 그야말로  이야기 화수분이었다. 생각과 느낌을 끄집어내 글로 표현해 내는 방법을 몰랐을 뿐. 사실 그건 어른들도 힘든 일인데 말이다. 그 후로 아이에게 일기를 쓰라는 말 대신 꼬리에 꼬리는 무는 질문을 던졌다. 생각을 끄집어내고 표현해 내는 힘을 키우기 위해.  

    

 아이는 현재 열 살이 되었다. 어느 날 자랑스럽게 다가와 공책 한 페이지를 내밀었다. “엄마 내가 쓴 글이야!” 한눈에 봐도 제법 문장들이 많고 길었다. 읽어보니 문장 구조는 서툴고, 맞춤법도 틀렸지만, 그 글을 읽는 내내, 아이가 생각을 글로 표현함에 있어서 이전 단계를 수렴하고 새로운 단계, 언어의 무한대 극한을 향해 첫걸음을 내디뎠다는 것을 느꼈다. 느낌과 생각을 잘 담아낸 글이었다. 스스로가 만족했는지 그 후로 아이의 일기장은 까만 글씨로 가득 채워졌고 아이의 글은 점점 더 복잡하고 풍부해졌다.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이야기구성에 맞춤법도 엉망이지만, 이야기의 주제는 날마다 새로워졌고, 글쓰기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즐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이는 이제껏 자신만의 속도로 수렴하며 성장해 왔다. 말을 하고 글자를 읽고 생각을 쓰는 과정 하나하나를 수렴하며 그다음 단계로 나아갔다. 지금은 나아가는 것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확장을 하며 자신의 세계를 넓히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은 아이가 자신만의 속도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는 것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각자의 궤적을 따라 인생을 살아간다. 그 궤적의 극한값이 각각 다른 목표에 수렴을 할 수도, 혼란스러운 발산을 할 수도 제자리걸음으로 진동할 수도 있다. 매일 달라지고 확장되는 아이의 일기장처럼 삶의 이야기나 삶의 목표도 하나의 결말에 수렴하지 않고 끊임없이 확장하는 무한대 극한값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 이야기의 결말이 오지 않기를 바란다. 인생의 열린구간에서 하나의 이야기로 수렴되는 것이 아닌, 무한히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나갈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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