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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미화 Sep 30. 2024

‘있는 척’ 하지 말고 ‘있으면’ 돼.

솔직함을 마주하는 순간

 나도 고상한 글을 쓰고 싶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문장, 어려운 단어하나 없는 문장이지만  헉소리 날 정도로 명치를 세게 때리는 을 쓰고 싶었다. 쉽게 말해 글로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어떻게 저런 단어와 문장들을 쓰지?’ ‘어떻게 저런 표현이 술술 말하듯 써질까.’ 좋은 책을 읽을수록, 좋은 글을 읽을수록 부러움과 존경심은 꽈배기 꼬이듯 꼬여 자기 비하와 자괴감으로 매듭이 지어졌다. 꽈배기는 맛있기라도 하지.     


 한참을 관찰했다. 트집을 잡고 싶어서는 아니다. 고상한 저 글을 쓰는 사람도 필시 나와 같이 인간적인 면이 분명 있을 거라고. 저 사람도 ‘잘 나가는’ 누군가에게 질투를 느껴 괜스레 관심 없는 척 못 본 척 딴청을 피우는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고상한 글과는 달리 말투는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겠지,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모습도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인격적인 부분은 그렇다 쳐도, 행색은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무릎이 툭 튀어나온 후줄근한 옷차림을 하고선,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묵고, 다크서클 한껏 내려온 얼굴에, 뱅글뱅글 어지러운 안경을 쓰고, 자라처럼 목을 쭉 빼고 글을 쓸 때도 분명 있을 거라고. 편협한 색안경을 낀 나의 관찰은 상상 혹은 망상이었고, 쓰고 보니 그 모든 것이 결국 ‘나’였다.     


 더 유치한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했던 말과 행동들의 유치함은 대상을 가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나와 다른 청춘들의 시간을 시샘했던 걸까. 아니면 내 청춘에 대한 후회였을까. 아이들과 이야기하는 순간에도 나는 가끔 나를 버렸다. 나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건지, 후회를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는 사이, 풍선껌처럼 동그랗게 내 입에서 부풀려진 이야기들은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망울 덕분에 이따금 얼굴을 뒤덮을 만한 크기까지 부풀어 올랐다. ‘펑’. 다시 입안으로 넣어진 풍선 껌은 잘근잘근 씹어져 다음 이야기를 위해 준비, 원위치한다. 다시 ‘후’. 문득, 위선인지 진심인지 모를 입자들을 가득 담고 있는 그 풍선껌이 무의미한 상태로 터져 날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공허한 입김 속에 날아가버릴 허상들 말고 남겨질 진실에서 유의미함을 찾고 싶었다. 진짜 나 말이다.      


 외면하고 있던 것들을 면밀히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비틀어진 기억일지라도, 남아있는 감정의 잔상들까지도 솔직하게 써보기로 했다. 투명한 척 불투명한 내가 어느 순간 낯설어졌기 때문이다. 단아하고 고상한 문장들을 동경한 마음이 왜 자기 비하의 행태로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있는 척’을 하지 말고 정말 ‘있으면’ 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마음, 못하는 건 못한다고 싫은 건 싫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마음, 잘나면 잘난 대로 못나면 못난 대로 거침없이 내보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다. 왜 몰랐을까라는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에서 '투명한 척' 불투명하게 버텨왔다. 그러다 스스로 위로했고, 한참 모자란 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인생행로를 트는 중이라는 사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한 말 같은 것들은 내가 정말 나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의미가 없었다. 펑 터져버릴 풍선껌처럼.     


 그림자 속의 진실.     

수학에 정사영이라는 개념이 있다. 3차원 공간의 물체를 낮은 차원 평면에 ‘투영’하여 그 물체의 모습을 단순화시키는 개념이다.  쉽게 말하자면  ‘그림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빛에 의해 투영된 물체의 모습은 전체적인 입체감이나 복잡함은 사라지고 단순한 그림자의 형태로 물체의 윤곽 혹은 일부분 또는 왜곡된 일부의 형태만을 전달한다. 위선은 마치 고차원의 무언가를 낮은 차원으로 투영하는 과정에서 정보의 일부만 드러내고 나머지는 숨겨버린다는 점에서 정사영과 닮아있다. 삶에서, 글에서, 그리고 나 자신을 투영할 때도 나는 그렇게 투영된 일부만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있는 척’ 말이다.     


 누군가가 위선도 필요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내가 원하는 사람들과의 소통을 위한 심리적 방어기제로,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하려는 하나의 방식으로 본다면 가식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위선적인 행동이 그 기대에 부합할 때, 적당히 타협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으니 그 말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적당한 위선이라도 결국 어떤 식으로든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sns를 하던 중 누군가의 글이 눈에 들어왔다. 모든 이에게 유하고 다정한 그 사람은 평온하지만 단단하고 거침없는 유려한 문체로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고상함과 우아함이 풍기는 그의 사진에서 나는 알 수 없는 위축감마저 느꼈다. 세련되고 우아한 그의 말투와 언변은 나의 투박한 사투리 억양과 비교되었다. 주눅이 한껏 들었다. 짙은 그림자가 내 마음을 새까맣게 덮었다. 내 글은 갑자기 초라해 보였고 나는 나 자신의 부족함을 확대해 해석했다. 타인의 결과물과 나의 결과물을 비교하며, 나는 내게로 투영된 그림자만 바라봤다. 빛이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내 실체를 왜곡하는 줄도 모르고.      


 글을 쓰면서 내 앞에는 두 개의 나 자신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나는 글을 쓰는 나. 또 하나는 글 속에 드러나는 나. 두 존재는 종종 충돌했고, 때로는 절묘하게 맞물렸다. 위선적인 모습을 드러낼 때도 있었다. 타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를 의식하면서,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진실된 감정들을 감추곤 했다. 그러나 꾸며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꾸미지 않고 글을 써보기로 했다. 감정을 글로 풀어내면서 나는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남과 비교하는 나 자신을 직면하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그것을 글로 써 내려가는 순간은 묘한 해방감을 느꼈다. 쓰면서 모든 것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나의 진짜 감정과 생각이 고스란히 나왔다. 그렇게 조금씩 투명해지며 그림자를 지우고 싶었다.      


최근에 이런 말을 들었다.     

“너 예전하고 달라. 많이 변했다?”     


 순간 내가 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 되묻지 않았다. 내가 나를 잘 알기 때문이었을까. 의문형인지 감탄문인지 애매한 말투가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대답하지 않았다. 과거의 일들은 자꾸만 발목을 잡았고, 여전히 많이 흔들리는 현재를 버티고 있다. 투명함 속에서 피어나는 용기가 무엇인지 이제는 잘 알기에, 나는 자꾸만 달라지겠다고 다짐하며 속으로 나직하게 대꾸했다.      


‘너 아직 나를 잘 모르는구나.’      


 솔직해지는 것은 언제나 두렵다.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내가 타인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림자 속 진짜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글쓰기는 나를 투영시키는 것이다. 주눅 들고 초라해지는 수많은 순간 앞에서 감추고 싶었던 진실들을 글 속에서 풀어내는 동안 나는 점점 나 자신을 이해하게 됐다. 우리는 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사실 그 뒤에 숨겨진 진실이 각자의 삶의 본질을 이룬다. 진실된 나를 마주하고, 그것을 글로 풀어내는 순간, 투영된 위선은 사라지고 비로소 진정한 내가 드러난다. 나는 지금 글쓰기를 통해 그 진실과 마주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 더 이상 그림자 속에 숨지 않고, 빛 아래서 나를 투영해 투명한 나만의 이야기를 써 가고 싶다. 조금 부족하고, 조금 느릴지라도. 있는 척 말고 있는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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