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건 돌리기
시시한 일상의 조각들이 글이 된다면
막역한 여자 셋이서 오랜만에 만나 맥주잔을 부딪친다. 테이블 위에 놓아둔 마른안주를 하나씩 집어먹는 것으로 부족했는지 각자의 이야깃거리가 안주로 추가된다. 먹지 않고 뱉어내는 안주임에도 맥주가 더 맛있어진다. 육아 이야기, 남편 이야기, 시댁 이야기, 아는 사람 이야기,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 이야기를 수건 돌리기를 하듯 돌린다.
수건은 돌고 돌아 차례대로 각자의 이야기에 놓인다. 때로는 돌고 있는 수건을 낚아채어 달리는 변칙도 일어난다. 대부분 수다가 그렇듯, 이야기의 흐름은 ‘나’에게서 시작되어 어느새 얼굴도 모르는 사돈 팔촌의 일상까지 간다. 생판 모르는 어느 아이 엄마의 사담까지 들어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조금 지치기도 했지만, 각자의 생업과 가사와 육아의 이유로 일 년에 한두 번도 만나기 힘든 얼굴들이었기에 어떤 이야기가 되었든 눈치껏 흥미로웠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 복잡다단한 일들이 어찌나 많이 들어있던지, 수건은 계속 돌고 돌았다. 정말 별의별 사람들이 많다. 세상은 이토록 넓고 다양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는데, 집과 일터가 일상의 전부인지라, 운신의 폭이 좁은 나로서는 그들의 열띤 ‘남의 세상’ 이야기는 맥주 안주로는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맛있었고 수다로 인해 텁텁해진 목을 축여주는 맥주는 기가 막히게 시원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그 사소하고 하찮은 이야기들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누구보다 신나고 맛깔나게 풀어놓는 내 눈앞의 ‘수건 돌리기 입담꾼들’이라는 것이다. 단정한 문장도 아니고 심사숙고하여 고르고 고른 단어들도 아닌 날것 그대로의 말들. 즉흥적으로 나온 이야기들임에도 불구하고 인물묘사는 생생했으며 서사의 개연성 또한 나무랄 데가 없었다. 게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나오는 맞장구는 이야기의 재미를 증폭시켰다. 어디 가서 발표라도 하라면 말도 못 하는 우리들의 비루한 입담에 날개가 달린 것만 같았다. 즐겁고 유쾌하고 영양가 없는 이런 부류의 수다는 맥주 한 모금 뒤 ‘카’하며 나오는 소리와 함께 공기 중으로 휘발되고 다음 주제로 이어졌다.
맥주가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랑과 자화자찬, 자기도취는 고갈되고 신세 한탄, 원망, 슬픔, 후회와 같은 눅진하고 질척한 감정들이 하나둘씩 고개를 내밀었다. 이야기꾼들의 장르가 순식간에 변한다. 스포트라이트는 오로지 각자의 머리 위에만 내려온 듯, 자신들의 깊은 이야기들을 비치기 시작한다. 힘들었던 일, 억울했던 일, 속상했던 일, 누군가가 미웠던 일. 이야기는 어느 순간 무대 위의 독백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저 들어주기만을 바랐던 사람처럼 그렇게 푸념을 늘어놓는다.
사실 나는 부정적인 대화를 하고 집에 돌아온 날이면 유난히 마음이 힘들었다. '그러는 너는 마냥 긍정적인 사람이냐'라고 한다면, 당연히 아니다. 조금의 틈이라도 보이면 비집고 나오려고 기를 쓰는 것들이 내 안에 꽉 차 있다. 부정적인 이야기가 돌고 도는 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마음의 빗장이 열려 부정적인 감정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최대한 방어태세를 갖춘다. 이따금, '나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라는 공격적인 자세도 취한다. 그래서 때로는 상대의 힘듦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비칠 때가 있다. 때에 따라서 공감을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했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다. 다만, 집으로 가면 마음이 힘들 뿐이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조금씩 나를 갉아먹는다. 갉아 먹히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야금야금 나를 잠식시킨다. 곁에 두고 싶지 않은 감정. 그래도 정 힘들면 '아, 힘들다!'하고 내뱉으면 조금 나아지려나 싶지만, 딱히 나아지는 건 없다. 생각이 형태를 가지는 순간 정말 힘든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 같으니까. 말을 내뱉음으로써 완벽히 진짜가 되어버리니까. 그래서 힘들다'라는 말을 아꼈다. 대신에 '괜찮다''또 지나갈 거다'라는 말로 숨기고 외면했다. 수건이 놓이고 스포트라이트가 내 머리 위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버티고 있었구나.”라는 지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맥이 탁 풀렸다. 일순간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도 이때다 싶었는지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것처럼 콸콸 쏟아져 나왔다.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넘어지고 다치고 무너지는 날도 참 많았다. 결국, 털고 일어나야 하는 것은 내 몫이란 걸 오래전부터 이해했기에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나의 힘듦’은 ‘나의 약점’이 되어 돌아온다 생각했다. 타인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일 또한 타인을 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며,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 마음이 나아지는 것도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가면을 쓰고 다시 희희낙락거리는 것도 참 기가 빨리는 일이었다.
애초에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일어서기란 힘들다는 걸 알기에, 부정적인 감정이 날 자빠뜨리면 ‘그냥 그대로 납작 엎드려 있자. 시간이 해결해 준다.’라고 생각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견디는 시간이 나름 최선의 해결책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버틴다’라는 단어 한방에 무너지고 말았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고 알면서도 알지 못하는 것투성이다. 소름이 돋을 만큼 기가 막힌 한 문장으로 소설 이야기의 마지막이 마무리되는 것처럼 그 ‘버틴다’라는 단어가 장마철 습기만큼 눅눅한 감정들의 향연 끝에 큰 방점을 찍어주며 이야기는 마무리되었다. “괜찮다. 그기 사람 사는 거 아니겠나!”. 스포트라이트가 꺼진 걸 확인하고 우리는 다시 맥주잔을 부딪치며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단숨에 잔을 비우고 다시 잔을 채웠다. ‘이야기 수건 돌리기’는 계속되었다. 이번엔 조금 더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로.
사소하고 하찮고 쓸데없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어찌나 재미있는지. 그 많은 이야기를 어떻게 담고 일상을 살아오며 버텨왔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때로는 손뼉 쳐가면 공감도 하고, 때로는 적당히 흘려도 듣고, 때로는 눈에 불을 켜고 반박도 해보고 타협도 해보지만, 남의 세상 이야기도 내 세상 이야기도 사람 사는 이야기는 고민도 걱정도 자랑도 욕심도 사실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사소해서 하찮아서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사람 사는 이야기. 수건은 그렇게 돌고 돌아 나의 손에 쥐어질 수밖에.
수다는 시시한 일상의 조각들을 지루할 틈 없이 기가 막히게 엮어 낸다. 그저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은 그렇게 맛깔나게 말하면서 글은 왜 이토록 딱딱하고 지루한지. 똑같은 일상을 글로 풀어내려 하면, 그 즉흥적인 재미는 사라지고, 마치 진지한 보고서처럼 변해버린다. 왜 그럴까. 이야기로 풀어내는 순간, 우리는 무언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지금 내가 위의 수건 돌리기 이야기에서 이렇게 의미를 가져오는 것처럼. ‘이 이야기는 충분한 메시지가 있어’ ‘가치 있는 글이 되어야 해’라고 주장하려 하니 매번 글을 쓸 때 부담이 된다. 하지만 수다는 그런 부담이 전혀 없다. 그냥 맥주 한 모금과 함께 꿀꺽하고 삼켜지면 그뿐이다. 마른안주를 씹으면서 앞사람에게 자연스레 순서만 넘겨주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수다는 자유롭고 재미있다. 글쓰기도 수다처럼 자유롭고, 재미있게 풀어낼 수 있을까? 아무래도 맥주와 마른안주, 상상의 독자가 필요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