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글이 잘 풀리지 않는다. 몇 문장 겨우 썼을 뿐인데, 무언가 자꾸만 빗나가고 주제는 흐려진다. 마치 수면 부족으로 흐릿해진 나의 정신처럼. 생각의 속도가 느려지고, 글의 결이 거칠어진다. 빠르게 믹스커피 한잔을 타왔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이야기들을 활자로 풀어내며, 다시 현실을 재구성하고 해석하는 것.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그것이 무엇인지 머릿속을 스치며 이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재작년 여름, 바다 수영을 갔었다. 튜브를 허리춤에 차고 바다 위에 동동 떠 있었다. 튜브를 등받이 삼아 한컷 누운 자세로 바다만큼 파란 하늘을 보며 그저 물결이 이끄는 대로 경계도 없는 바다 위를 유영했다. 살짝 멀미가 나는 듯했다. 해변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바로 세우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았다. 튜브 덕분에 가라앉지는 않았지만 발밑을 가늠할 수 없다는 생각에 튜브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수영을 못하는 나는 튜브가 없었으면 바로 가라앉았을 것이다. 나는 물 공포증이 있다. 물 밖에서 눈으로 보는 바다를 더 좋아한다. 잔잔하고 반짝이는 윤슬을 넋 놓고 한 동안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그리도 평온해질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그 아름다운 수면 아래의 공간을 상상하면 숨이 막힐 듯이 무서워 생각을 뿌리치기 위해 머리를 흔들며 진저리 친다. 당장 나에게 해가 되는 것이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물결이 몸을 스치는 순간,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 얕은 파도의 일렁임에도 공포가 밀려왔다. 완전히 떠있지도 않으면서 발도 닿지 않는 그 모호한 경계는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끼게 했다. 물 밑에는 보이지 않지만 느껴지는 무언가가, 피할 수 없으나 직접 맞닥뜨릴 수 없는 어떤 것이 나를 잡아끄는 것 같았다. 상상 속 허공의 실체는 두려움 그 자체였고, 바다 위에 떠있는 나에게는 그 실재하지 않는 두려움이 그 무엇보다 강력한 실재(實在)로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물이 분명 존재하지만 발끝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 않았다. 마치 내가 현실을 온전히 붙잡지 못하고 떠돌고 있는 것처럼. 눈앞에 펼쳐진 바다와 나는 분명 같은 세계에 있지만, 내가 실제로 딛고 있는 것은 없었다. 마치 허수처럼.
허수에 대한 오해
없는 데 있는 수
상상의 수. 허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의미를 갖고 있다. 수학과 과학에서 쓰이는 방정식들에서 허수는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허수 없이는 전류를 계산할 수 없고, 복잡한 파동을 설명할 수도 없다. 허수가 없었으면 세상에 나온 방정식은 풀리지 못했을 정도로, 허수의 존재감은 대단하다. ‘없는 데 있는 수’ 계산에 반드시 필요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무형의 존재. 현실 속의 많은 문제들이 허수로 풀린다. 현실에 없는 가능성의 세계, 즉 일어나지 않는 것들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상징과 같이느껴진다.
삶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늘 눈에 보이는 것들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안다. 그 이면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우리의 선택과 행동을 이끌고 있다는 것을.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때때로 허수 같이 보이지 않는 것들에 의해 살아간다. 무엇을 하고 싶다는 꿈, 가능성, 희망, 때때로 불안, 걱정, 두려움과 같은 것들.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 존재감은 현실에서 명확하게 나타나우리를 어떤 식으로든 움직이게 한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허공에 발을 딛고 있는 불확실함 속에서 얻어지는 깨달음과 경험은 진짜 삶을 감각하게 한다. 그 속에 숨은 의미들은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하는 순간에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글쓰기는 그와 같은 허수들을 붙잡는 과정이다. 분명히 존재하는 그 감정과 생각을 글로 풀어내어 현실에 의미를 부여한다. 허수가 현실의 복잡한 방정식을 풀 듯, 글쓰기는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풀 수 있는 도구다. 나는 공상과 상상을 좋아한다. 사소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까지 보태서 조금 심하다 싶으면 누군가에게 ‘망상은 집어치워’라는 말도 들을 때가 있지만, 때때로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현실의 논리를 끼워 맞추는 걸 즐기기도 한다. 떠오르지 않는 생각들과 맞서며 발이 땅에 닿지 않는 것처럼 허공을 떠다니는 문장들을 붙잡으려 애를 쓰기도 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불현듯’이라는 말을 증명시키듯, 그 붙잡지 못하는 것들이 오늘의 글감이 된다. 허수가 방정식의 해가 되듯,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가능성의 조각들이 글을 풀어준다.
파도에 밀려 조금씩 해변과 멀어졌었다. 해변에서 멀어질수록 얕은 물결로 잔잔했지만, 나는 계속해서 해변과 멀어졌다. 팔을 휘저어 나아가려 했으나 나의 의지는 무의미했다. 저 멀리 보이는 누군가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손을 흔들었다. 미친 듯이.
멀리서 나의 구세주가 다가왔다.
“기분 좋아서 춤추는 줄 알았네. 이리도 잔잔한 바다에서. 바닥에 발이 안 닿아?”
“안 닿아.”
나를 건지러 온 나의 구세주는 동동 떠있는 나와는 달리 튜브가 없이도 반듯이 서있었고 바닥에 발이 닿아 있는 듯했다. 가슴팍에 잔잔한 물결이 부딪치고 있었다.
“짧군.”
“길어서 좋겠다.”
유머 같지도 않은 유머였지만 덕분에 긴장이 풀렸고, 나는 질질 끌려가다 겨우 몇 발 가지 않아 다시 발 끝에 모래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뒤를 돌아 내가 있던 자리 너머로 물빛이 깊어지는 먼바다 쪽을 바라봤다. 잔잔하고 반짝이는 윤슬이 보였다. 삶의 물결은 결코 잔잔하지 않다. 파도는 끊임없이 몰려오고, 우리는 그 위에서 흔들린다. 때로는 의도치 않게 먼바다로 쓸려나가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고, 때로는 나에게 오는 파도를 내가 직접 넘어가야 할 때도 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순간처럼, 아무것도 붙잡을 수도,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겁먹고 당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허수처럼 보이지 않는 두려움과 걱정이 나를 집어삼키려 할 때마다 내가 배우는 것은, 피하지 않고 그 속에서 나의 의지로 나를 지켜내는 방법을 찾는 것이라는 걸. 그것마저 안된다면 구조요청이라도 해야 된다는 걸. 살면서 파도는 늘 밀려오고, 물결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지 않겠지만 그 속에서 나는 점점 더 단단하고 현명하게 살고 싶다. 오래도록 쓰는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