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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수돗물 쓰나미 사건

그 많던 포스트잇은 누가 다 먹었을까?

by 미스리

사라졌다.


비밀번호와 학급 알림사항들이 적힌 십여장의 정사각형 포스트잇들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post-it-notes-1284667_1280.jpg 사진출처: https://www.sciencephoto.com/media/1058509/view/sticky-notes-on-a-wall


벽에 한장, 책상 위에 한장, 랩탑 위에 한장, 그리고 책상 여기저기에 두어 장. 어느새 그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다. 바람에 날려간 걸까? 옷깃에 스치며 떨어져 나간 걸까?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포스트잇의 얄팍한 접착력이 못 믿어워 단단히 테잎을 붙여 고정 후 다시 몇 장을 고정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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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라졌다.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창문이 굳건히 닫힌 우리반에 그날부터 정체불명의 허리케인이 불기 시작했다. 포스트잇만 쏙쏙 낚아채 가는 "포스트잇 도둑"의 정체는 대체 누구일까?





소피아다!
내 포스트잇들을 모조리 집어삼킨 정체불명의 돌풍 허리케인은 바로 소피아였다.


소피아가 전부 먹었다. 내 수많은 패스워드와 학급 알림사항들이 그녀의 배 속으로 꿀꺽 삼켜져 버렸다.


포스트잇 재질의 얇은 종이, 부드러운 티슈, 다소 거친 질감의 페이퍼타올만 눈에 띄면 벌떡 일어나 허리케인처럼 달려와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 꿀꺽 삼켜버리는 우리반 5학년 허리케인.


첫 포스트잇 실종 사건 이후로 2주일이 지나고야 알았다. 소피아가 PICA 증상 (섭식장애의 한 유형)이 있았다는 것을.


PICA (이식증)는 섭식장애의 한 유형으로, 소화할 수 없거나, 영양소가 전혀 없거나, 음식이 아닌 물질을 충동적, 반복적으로 섭취하는 정신질환이다. 예를 들어, 흙, 나뭇잎, 종이, 분필, 머리카락, 천 조각, 실 등의 비식용 물질을 강하게 갈망하며 반복적인 이상 섭취 행동을 보인다.


소피아는 자폐 스펙트럼 (Autism Spectrum) 진단을 받은 학생으로, 하루의 95% 이상을 내 특수학급에서 보낸다. 3세부터 꾸준히 특수교육 서비스를 받아왔지만, 해가 지날수록 소피아의 행동은 점점 더 복잡하고 심각해졌다.


그 후로, 모든 종이를 숨기고, 캐비넷을 잠그고, 좋아하는 크래커를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잘 보이는 곳에 비치하고, 그리고 여러 오감 놀이들로 관심을 돌리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해봤다.


늘 고개를 숙인 채 한쪽 귀를 검지로 누르며 앉아있길 즐기는 소피아.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돌리며 "수색 레이더"를 켜는 순간, 내 "방어 레이더" 역시 즉시 작동한다.


'소피아, 종이 식감을 원하는구나. 그 식감이 너의 오감에 만족을 주는구나.'


하지만, 종이들이 눈에 쉽사리 띄지 않자, 그녀는 벌떡 일어나 교실 구석구석을 수색하며 종이사냥에 나선다.


'그럴 줄 알고 다 잠궈놨다.'


결국 소피아는 체념한 듯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수학 시간.


본인의 계산법으로 손가락을 두드리며 숫자 15를 쓰는가 싶더니, 이내 A4 수학 문제지를 마구 구긴 후 입에 후다닥 밀어 넣는다.


나의 "종이 방어 전선"이 이렇게 쉽게 뚫리고야 말았다.


소피아의 실제 모습


소피아의 입에서 종이를 재빨리 꺼낸 뒤, 나는 소피아에게 깊은 심호흡을 유도하며 진정시키려 했다. 상황이 안정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허리케인 소피아는 쓰나미로 진화했다.


소피아는 번개처럼 계수대로 달려가더니, 망설임 없이 수도꼭지를 뽑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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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폭포수처럼 솟구치는 수돗물! 삽시간에 우리반에 수돗물 밀물이 몰려오고 말았다.


소피아의 마음 안에 강박적인 종이 섭취 욕구의 강풍이, 그 바람을 제어하는 환경과 강하게 충돌하며, 결국 거대한 수돗물 쓰나미를 만들어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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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는 열대우림 정글 같던 우리 반, 너희 모두가 라이언 킹이길 바랬다.

어제는 밀폐된 수족관 같던 우리 반, 너희 모두 니모를 찾길 바랬다.

그리고 오늘, 수돗물 쓰나미로 아찔한 바다로 변한 우리 반에서 학생들 모두 재난 영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시금 생각한다. 우리반 "행동 기상레이더" 점검을 다시 하노라고.


내 근접 시야 안에, 손 닿는 거리 안에 있던 소피아에게서 이런 해일이 몰아칠 줄은 몰랐다. 소피아의 마음에 가까이 갔다고 생각했지만, 깊이 가진 못한 셈이다. 결국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읽지 못했으니 말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졌던 포스트잇 사건은, 강풍이 몰고 온 쓰나미 사건으로 이어지며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오늘도 난 "행동 등대지기," "행동 관제사"가 되어
우리반 이상 기후 점검을 한다.


Lighthouse (1).png


작은 바람 한 줄기에서 시작된 변화가 어느새 폭풍과 쓰나미로 번질 수 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내일 또 어떤 바람이 불어올지 몰라도, 아이들의 마음 기류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함께 항해할 행동 등대지기로서의 다짐을 다시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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