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 캐빈과 오렌지 미스리: 교실 속 모험일지
이 작은 1학년 꼬마가 단번에 전교생과 교사들을 적군으로 만들어버리는 위력, 상상 그 이상이다.
문제지 맨 위, 캐빈은 아주 친절하게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공부할 결심"이 선 모양이다.
파란색 동그라미, 그 위에 파란 머리, 친절한 동그란 눈과 입꼬리. 그건 바로 캐빈 본인의 자화상이다.
오렌지색 동그라미, 그 위에 똥머리, 친절한 동그란 눈과 입꼬리. 그건 특수교육 교사, Ms. Lee의 초상화이다.
캐빈은 말보다 그림으로, 글보다 색으로, 자신의 마음과 관계를 표현하곤 한다. 그리고 나는 그 표현 속에서 그와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이 동그라미 학생과 교사의 표정은 일러스트레이터 캐빈의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
공부할 결심이 서면, “블루 캐빈, 오렌지 미스리” 그림을 그리며 셀프 오프닝 의식에 임한다. 내가 좋아하는 색상이 오렌지이고, 본인이 좋아하는 색상이 블루이기에, 우린 반드시 저 색상의 테두리 옷을 입어야 하고, 난 반드시 저 상투머리를 가져야 한다. 재미있는 건, 내 일상적인 똥머리에 대해 서로 단 한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음에도, 캐빈은 무심하게 내 상투머리를 쓱쓱 그려 넣는다.
이 그림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다. 캐빈이 강박적으로 치루는 Self-Soothing (자기 위안/만족) 의식인 셈이다. 그 속에서 그는 안정감을 찾고, 나와의 관계를 시각적으로, 색과 선으로 확인한다.
캐빈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전교에서 유명한 아주 아주 아주 아주… 아주 특별한 학생이다. 그 누구와도 쉽게 비교할 수 없는, 본인만의 리듬과 규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특별함을 가진 학생이다.
그의 남다른 특별함은:
귀여운 미소: 100점 만점에 100점
기억력: 100점 만점에 100점
산만함/부산스러움: 100점 만점에 100점
수업시간 집중력: 10,000점 만점에 100점
본인이 원하는 놀이에 대한 집중력: 100점 만점에 100점
(본인 감정에 대한) 솔직함: 100점 만점에 100점
(본인 감정에 대한) 배려심: 100점 만점에 100점
(타인에 대한) 배려심: 10,000점 만점에 100점
유쾌함: 100점 만점에 100점
괴팍함: 100점 만점에 10,000점
(괴팍한) 유머, 재치: 100점 만점에 100점
존재감: 100점 만점에 10,000점 (꿈에도 나온다)
100점 학생 캐빈이 등장하면, 교사들은 10보 후진, 학생들은 20보 후진하며 대피할 정도니, 이 작은 1학년 꼬마가 단번에 전교생과 교사들을 적군으로 만들어버리는 위력은 상상 그 이상이다.
수업 시간, 특히 본인이 원치 않는 과제를 해야할 경우, 연필로 찌르기, 물건 부서뜨리기, 던지기, 의자 던지기, 책상 엎기…무궁무진한 방식으로 자신의 불만을 표현한다. 그를 의자에 앉히는 데에만 엄청난 에너지, 감정, 전략을 동원해야 하고, 무한한 인내력을 전력 가동시켜야 한다.
이렇게 불친절한 기록을 가진 캐빈씨가 공부를 하기 위해 앉았다. 그리고 친절한 동그라미 두 사람 그림을 그렸다. 심지어 저 동그라미 두 사람은 늘상 웃으며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나는 그의 아군이다.
그림 의식을 마친 캐빈이 공부 태새 모드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얼마나 친절한가. 얼마나 기특한가. 얼마나 고마운가.
그렇게 우린 수학 연산법, 영어 문장 완성법을 공부했고, 수 많은 책들을 함께 읽었고, 과학, 역사 등 1학년 교과 공부를 했다.
비결이 뭐냐고? 은밀한 거래였다.
“딱 30분 동안 집중하고 이걸 마치면, 우린 바로 나가서 달리기 시합을 할꺼야! 내 생각엔 내가 이길거 같은데, 너는 누가 이걸거 같아?”
“나, 나, 내가 당연 이기죠!”
“그래, 한번 겨뤄보자.”
이런 수많은 거래들을 미끼로 캐빈은 불룩불룩 공부를 했고, 30분의 약속을 삐딱빼딱 위태롭게 지켰고, 그리고 비릿비릿 우린 함께 달렸다.
누가 이겼냐고? “달려라 하니” 미스리가 10보는 앞서 있었으나, 일렁일렁 우락부락 후폭풍을 예상해, 목표지점에서 신발끈을 묶고 말았다.
그리고 승자는 100점 학생 친절한 캐빈씨!
거래에만 응한다면, 난 얼마든지 결승전에서 꽁꽁여민 신발끈을 100번 더 묶을수 있단다.
“미스리 리스트”에 캐빈이 좋아할 만한 거래 리스트를 추가한다. 비누방울, 모래, 페인팅, 공룡 스티커, 달리기, 댄스, 숨바꼭질...
이 얼마나 자본주의 이념이 충만한 학급인가. (불)공정한 흥정/거래로 개개인에게 교육 투자, 배움의 균등한 분배가 이뤄지니 시장경제 시스템이 풀로 가동되는 참 친절한 학급이다.
아주 친절한 캐빈씨는 아군 미스리와 또 다른 아군 학급 학생들을 위해 수학 문제지도 직접 만들어준다.
캐빈 1 + 미스리 3 = ___
내 책상 주변에 “오렌지 미스리” 그림을 붙여준다. 캐빈과 미스리의 심심풀이 미로찾기는 덤으로.
리미티드 크리스마스 버전 수학 문제지와 색칠공부 그림까지. 캐빈은 산타모자를 쓰고, 미스리는 루돌프 코로 성형했다. '썰매는 내가 끌어야겠군!'
아군 미스리에게 잔잔한 섭섭함이 있을 때는, 이 동그라미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기도 한다.
캐빈, 그래도 희망의 메세지는 함께 적었구나.
"We All Nice" ("우린 그래도 좋아!"로 해석됨)
오늘도, 캐빈과 나는 작은 결심과 거래를 통해 하루를 함께 이겨냈다. 그 속에서 나는 다시금 깨닫는다. 교실 속 작은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특별한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을.
캐빈, 공부할 결심을 해줘서 고맙다. 내일은 어떤 결심으로 친절한 캐빈씨의 면모를 보여줄꺼니? 내일의, 매일의 너의 공부할 결심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