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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비밀, 내 머릿속의 계산기

5초 침묵의 비밀

by 미스리

“말할 수 없는 비밀- 별 토헤는 밤”에서 나눴던 노엘에 대해 이번 스토리에서 더 나누고 싶다.


선택적 함묵증 (Selective Mutism)은 말을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상황이나 장소, 사람 앞에 노출될 때에 말을 하지 못하는 불안장애 (anxiety disorder)의 일종이다.


자폐 스펙트럼 (Autism Spectrum)선택적 함묵증 (Selective Mutism) 판정을 받은 4학년 노엘은 지난 5년간 학교에서 말을 하지 않은 기록을 갖고 있었다.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 한 후, 내 특수학급으로 전학온지 6개월만에 노엘은 함묵의 금기를 깼다.


감사하게도 그 날은 내 생일이었다. 화창한 3월의 봄날 금요일 내 생일 오후, “노엘의 침묵”이 깨진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그 다음 주 월요일, 난 자연스레 그리고 조심스레 노엘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Good morning, Noel!” (좋은 아침, 노엘!)


노엘은 지난 5년의 침묵이 무색할 정도로 무심하게도, 그러나 분명하게 내게 화답했다.

“Good morning, Ms. Lee!’ (좋은 아침, 미스리!)


그 날 오후, 놀이터 벤치에 함께 앉아 우린 대화를 나눴다.


“Last Friday, I was so happy when I first heard your voice and words. It was the best birthday gift ever! It was my birthday, by the way” (지난 금요일, 처음으로 네 음성과 말을 들었을때 난 너무 기뻤어, 그건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었어! 사실 그 날이 내 생일이었거든.)




돌아온 노엘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절대 예상치 못했던 회답이었다.


“How was your Thursday last year?” (작년에 목요일은 어땠어요?)


“Which Thursday are you talking about?” (어떤 목요일을 묻는거야?)


“Your birthday! It was Thursday last year.” (선생님 생일이요! 작년에는 목요일이었어요)


재빨리 폰 캘린더로 작년 내 생일을 확인해보니, 목요일이 맞다.


“Umm, I had a great time…by the way, do you know which day was my birthday in 2012?” (음.. 좋았지, 근데 2012년에 내 생일이 무슨 날인지도 아니?)


“It was Monday!” (월요일이요!)


역시 월요일이 맞다. 폰 캘린더를 옆에 두고 계속 질문을 이어나갔다.


“Hmm, what day was my birthday in 1995?” (1995년도에 내 생일은 무슨 날이지?)


“Sunday!” (일요일!)


평정심을 유지하고, 이번엔 랜덤으로 아무 날짜나 물어보기 시작했다.


“What day was August 1st in 1922?” (1922년 8월 1일은 무슨 날이지?)


“Tuesday!” (화요일)


약 5초 안에 노엘이 전부 정확한 대답을 했다. 노엘은 5초 정도의 “내 머릿 속의 계산기” 과정을 거친 후 답을 내놓았다.


그 짧은 순간, 노엘의 머릿속에서는 도대체 어떤 공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걸까? 순간, 벽걸이 일간 달력이 강한 바람에 날리며 빠르게 특정 날짜로 타다닥 넘어가는 상상이 스쳤다. 노엘은 탁! 하고 그 날의 달력 종이를 멈춰 세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영화 “레인맨"이 떠올랐다. 주인공 톰크루즈의 형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레이몬드.


레이몬드는 흔히 “고기능 자폐”라고 불리는 아스퍼거 신드롬 (Asperger Syndrom; 일반 자폐 스펙트럼과는 상이하게 언어, 인지 능력이 약간 부족하거나 정상이지만, 결여된 사회성과 비정상적으로 특정분야에 과몰두하는 증상)과 서번트 증후군 (Savant Syndrome; 뇌손상으로 특정 분야에 매우 비범한 능력을 보이는 증상)을 갖고 있는 캐릭터였다. 이 기이한 천재성을 가진 자들은 비범한 암기력, 기억력, 수리/계산능력이나 음악, 미술, 운동 등의 영역에 천부적인 능력을 가졌지만, 전반적인 학업능력이나 사회성은 여전히 많이 결여되어 있다.





노엘은 숫자에 집착하고 패턴적 사고를 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학교 카페테라아에서 2명이 노란 셔츠를 입고, 4명이 파란 셔츠를 입고, 6명이 빨간 셔츠를 입고 있다면, 숫자 (2의 배수)와 색상의 패턴 (원색, 기본색상- 노랑, 파랑, 빨강)에 대해서 독백하듯 내게 얘기를 했다.


“Two, four, six… each group of them wears each primary colored shirt!” (2, 4, 6, 각각의 그룹은 기본색상의 옷을 입고 있네)



노란 옷을 입은 아이, 빨간 옷을 입은 아이가 같이 앉아있는 모습을 보면 노엘이 이렇게 얘기했다.


“Yellow and red make orange!” (노랑과 빨강을 섞으면 오렌지가 되지!)


3명이 모인 그룹, 5명이 모인 그룹, 6명이 모인 그룹의 아이들을 볼때면,


“There’re triangle, pentagon, and hexagon!” (저기 삼각형, 오각형, 육각형이 있네!)



노엘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놀이, 관계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사물, 현상, 패턴에 관심을 두었다. 그녀는 학교의 50여개의 모든 교실 번호를 전부 암기했다.


“Ms. Abraham’s classroom is 202, Mr. Sam’s classroom is 107" (아브라함 선생님 교실은 202호, 샘 선생님 교실은 107호)




“노엘의 침묵”을 깨고 소통을 하기 시작한 후로, IEP (Individualized Education Program) meeting을 통해 노엘이 4학년 일반 학급에 참여하는 시간을 늘릴 수 있었다.


IEP (Individualized Education Program) meeting은 미국에서 장애 학생이 맞춤형 개별 교육을 받기 위해 1년에 한 번, 혹은 필요에 따라 여러 번 주최되는 공식적인 모임이다. 주로, 부모, 특수교육 교사, 일반 학급 교사, 교장 혹은 교감, 여러 테라피스트 (언어 치료사, 대/소근육 치료사, 운동 치료사), 그리고 부모가 고용한 변호사나 교육대리인이 참석한다.


기존에는 4학년 일반 학급에서 노엘이 참여할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었다.

매일 아침 미팅 30분 (간단한 게임이나 놀이를 통한 브레인 브레이크)

일반 학급 아이들과 놀이터 타임 30분


그러나, Social Studies (사회) 과목 45분 시간을 더 추가해서 비장애 학생들과 교류할 수 있는 시간을 늘렸다. 보통, 아이가 행동 및 인지 능력에 큰 문제가 없다면 아이 혼자 일반 학급 수업에 참여하고, 힘들어하면, 특수교사나 보조교사가 아이 곁에서 지원한다.


사진 출처: https://uniacco.com/blog/iep-meetings




노엘의 첫 일반학급 Social Studies (사회) 수업 날, 특수교사인 내가 함께 했다. 4학년 학급 교사가 수업을 진행했다.


“On May 13th,1607, British men arrived in Jamestown, Virginia, in North America! They are the first settlers!" (1607년 5월 13일, 영국인들이 미국 버지니아 주의 제임스 타운에 도착했어. 그들이 바로 첫 정착인들이야!)


노엘이 영국에서 5년간 거주했었고, 미국으로 이주했음을 떠올리며, 노엘에게 속삭였다.


“Wow! Noel, the first settlers are just like you. They moved from England to America!” (우아, 노엘! 첫 정착인들이 너랑 같아. 그들도 너처럼 영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했어!)


노엘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1초, 2초, 3초, 4초, 5초! ‘노엘, 설..설마 네 머릿 속의 계산기가 지금 가동되는거야?’


그 순간, 노엘이 조용히 속삭였다.

“Ms. Lee, it was Wednesday. May 13th in 1607 was a Wednesday!” (미스리, 수요일이에요! 1607년 5월 13일은 수요일이에요!)


나는 조용히 엄지척을 보여줬다!


내가 더이상 너에게 선택적인 함묵의 대상이 아니어서 고마워!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선택적 함묵의 환경이 아니어서 고마워! 그리고, 너의 특별한 능력을 보여줘서 고마워!




노엘이 내게 속삭인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선택적 함묵은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조심스레 마음의 문을 여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교사는 그 문을 함께 열어주는 열쇠라는 것을.


노엘의 눈 속에서 나는 플리트비체 호수의 별빛을 보았고,
노란 크레용으로 하늘에 태양을 그려 넣는 순간을 보았다.
숫자와 패턴 속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세상을 읽어내는 그녀의 특별함을 보았다.


3월의 금요일 오후, 내 생일날.
노엘과 나, 우리가 만들어낸 첫 번째 기적.

그 날 이후로, 나는 매일 아침 교실 문을 열 때마다 조용하지만 분명한 기적을 기대하며,
오늘도 내 자리에서 묵묵히 그들의 하루를 지켜주리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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