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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비밀, "별 토헤는 밤"

플리트비체 호수 속 별들과 노란 크레용

by 미스리

*학생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가명을 사용하였습니다.


“Ok, time to go! Have a great weekend! (이제 집에 갈 시간, 주말 잘 보내렴!)”


11월 어느 금요일 하교시간.


부산한 아이들이 사물함 주변에서 북적북적 가방을 싸고 있다. ‘그래, 그래, 어여 어여 가렴! Go, Go home! Hooray!’ 속으로 쾌재를 부르던 찰나, 덜컹, 심장이 멈칫! 철렁, 마음이 내려 앉았다.


노엘이 가만히, 서늘하게 나를 쳐다보고 있다. 짙고 커다란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반짝반짝 눈물 한자락이 그녀의 마스크 위로 주룩 흘렀다.


크로아티아의 아득한 플리트비체 호수가 별안간 홍수로 범람하듯, 알래스카 글레이셔 베이 수면 위로 불쑥 빙하 한 덩어리가 떨어지듯, 빗물과 빙하로 덮힌 눈이 나를 주시하고 있다.


“Do you need help? If so, give me a thumbs up.” (도움이 필요하니? 그렇다면 손가락으로 엄지척을 보여줘)


노엘이 천천히 엄지를 올린다.


“Would you mind writing on the whiteboard what made you sad?” (무엇이 널 슬프게 했는지 화이트보드에 써줄수 있니?)


노엘이 이렇게 쓰윽쓰윽 빠르게 쓴다.

노엘이 화이트보드에 직접 쓴 글


“금요 하교 눈물”의 이유가 "I will miss you" (보고 싶을 거에요) 였다니…


“금요 하교 쾌재”를 부르며 이미 퇴근 모드로 장착했던 미스리의 머쓱한 마음에도 빙하 한 덩어리가 떨어졌다. 간신히 눈물 범람을 참는다.




4학년 노엘은, 영국에서 전학온 내 특수학급 학생이다. 아버지의 파견근무로 지난 5년간 영국에서 살다가, 다시 본래 다니던 학교/내 근무지인 미국 동부의 초등학교로 돌아온지 2달 남짓 되었다.


노엘은 자폐 스펙트럼(Autism Spectrum)선택적 함묵증 (Selective Mutism)을 갖고 있다.


선택적 함묵증 (Selective Mutism)이란 정상적인 언어 소통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장소/상황/상대에 따라 선택적으로 말을 하지 않는 불안 장애이다. 과도한 긴장 때문에 말이 안 나오는 것이며, 주로 가정에서는 말을 잘하지만 낯선 환경이나 학교 등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


노엘은 지난 5년간 학교에서 말을 하지 않은 기록이 있다. 2달 전 나와 처음 만난 후로 우린 주로 간단한 수어, 제스쳐, 글로 소통을 해왔다. 조심스레 귀속말을 하도록 요청한 적이 있었지만, 돌아온건 옅은 입모양과 잔잔한 미소 뿐이었다.


노엘은 늘 조용했고, 차분했고, 규칙과 지시를 잘 따랐기에, 특수교육 학급에서 희귀한 모범생이자 "쉬운 학생"이었다. 대서양의 쓰나미 강풍, 열대우림의 카멜레온, 아프리카의 야생동물같은 내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노엘은 밤하늘의 별을 머금은 영롱하고 아득한 플리트비체 호수 같았다.



‘그래, 우린 이렇게 소통하면 되니까, 언제든, 준비되면, 내게 말을 걸어다오!’


그로부터 4개월이 지난 어느 3월 금요일 오후.


학교 놀이터 미끄럼틀 근처. 몇몇 쓰나미 아이들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We are the primary colors, red, blue, and yellow!” 아침 그룹 미팅때마다 즐겨 부르던 노래다.


아이들한테 물었다. “What would you like to draw with the yellow crayon in the sky?” (노란 크래용으로 하늘에 무얼 그리고 싶니?)


The sun! (태양!)


낯선 목소리, 그러나 낯익은 느낌.


대답을 한 학생은, 내 쓰나미 학생도, 카멜레온 학생도, 야생마 학생도 아니었다.


대답을 한 학생은 노엘이었다.


어디서 읽은 적이 있었다. 선택적 함묵증 학생이 어느날 갑자기 말을 한다면, 절대 놀라거나 과도하게 반응하지 말라고. 아이의 뇌가 다시 그 상황을 선택적 상황으로 인지해, 즉시 자신을 침묵 속으로 가두게 된다고.


격동의 기쁜 감정을 숨기고 태연하게 다시 물었다. “What would you like to draw with the blue crayon in the sky?”(파란 크래용으로 하늘에 무얼 그리고 싶니?)


“The cloud!” (구름)


밤하늘 별을 머금었던 플리트비체 호수가 이제 뜨거운 황금 햇빛을 머금은 반짝이는 호수로 변해, 커다란 눈을 반짝이며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날 3월의 금요일 오후.

“금요 하교 눈물”은 내가 마음 속에서 수 없이 흘렸다.


노엘이 내게 내 마음을 화이트보드에 쓰라고 똑같이 묻는다면, 이렇게 쓰고 싶었다.


“This is the best birthday gift ever in my life!” (이건 내 생애 최고의 선물이야)


노엘의 첫 음성을 듣고 “금요 쾌재”를 부른 그 날은 바로 내 생일이었다.




그 후로, 노엘은 그간 홀로 가슴 속에 머금었던 말들을 하나씩 뱉어내기 시작했다. 조용한 밤, 홀로 수많은 별들을 수면 아래로 삼켰던 플리트비체 호수가 하나, 둘, 셋, 넷… 수많은 별들을 토해냈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의 별들이 호수 아래에서 밤하늘로, 본연의 자리로 돌아갔다.


마지막 별을 토해내자, 일출이 찾아왔다.


아침 해가 두둥 떠오르고, 작렬한 태양이 호수 수면에 굴절된다. 태양빛은 무지개 색으로 갈라지며, 에메랄드빛 호수를 반사한다.

노엘! 3월의 금요일 오후, 감사하게도 미스리의 생일 날, 너의 마음이 열리고 그 마음에 노란 크래용이 주어졌다. 너의 마음에 노란 크래용을 내어주신 분, 태양을 그려주신 분을 찬양한다. 작렬한 태양빛이 너의 본연의 Primary Color를 더욱 선명하게 하고 반짝반짝 반사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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