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 첫 방문이라면...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로마와의 마지막 5시간 데이트
이번 여행의 시작이었던 로마를 거쳐 이탈리아의 북쪽 지방 볼차노부터 남쪽 끝 레체까지 종횡무진 이탈리아를 누빈 후 나는 다시 로마를 찾았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 한국으로 돌아가기까지 5시간의 자유가 나에게 주어졌다. 추는 노로바이러스로 인해 탈진 상태라 숙소를 잡아서 쉬게 하고, 나와 심은 남은 5시간을 보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마지막이 될 로마와의 5시간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알라는 다섯 시간 동안 뭐 하고 싶어?”
“보르게세 공원과 유명한 관광지로서의 성당이 아닌 동네 성당을 둘러볼까 해. 심은 뭐 하고 싶어?”
“나는 티라미수와 로마 3대 젤라토 맛집 중 한 곳에 가서 젤라토를 먹고 싶어.”
“그럼, 어차피 점심도 먹어야 하니 스페인 계단 근처까지 같이 가서 티라미수와 간단하게 점심 먹고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걸로 하자.”
“좋아.”
이렇게 해서 우리는 스페인 계단을 기점으로 마지막 로마와의 5시간 데이트를 시작한다.
낮에 보는 스페인 계단 주변은 새벽에 본 모습과 너무나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많은 여행객으로 활기차다. 우리는 허기진 배를 해결하기 위해 폼피 티라미수 집으로 향했다. 스페인 광장을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서니 긴 행렬의 줄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러면 그렇지... 로마에서의 줄은 기본이지... 이렇게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무리에 끼어 줄을 서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이 줄 맞아?”
“내가 한 번 앞에 가 볼게...”
“심... 우리가 줄을 잘 못 섰어. 여기는 파스타 집이야.”
그렇다면 우리가 찾는 폼피는? 긴 줄의 행렬인 파스타 집 맞은 편이 폼피가 아닌가?
“그런데~~ 여기는 줄이 없네...”
왜 줄이 없는 거야? 기분 좋으면서도 의아하며 금세 티라미수를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이곳 역시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곳이라 그런지 나이 지긋한 종업원이 한국말을 간간이 섞으며 우리에게 웃음을 선사하다.
“예쁘다... 맛있다... 한국 사람 좋아해...”
25년 전에는 나를 보면 ‘차이니즈? 재팬?’이 먼저였고, ‘코리안’이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이제는 이들의 입에서 ‘코리안?’이 가장 먼저 나온다. 그만큼 한국의 위상이 높아진 셈이겠지.
우리는 티라미수를 가지고 스페인 계단 아래에 있는 ‘바르카차 분수(난파선의 분수)’ 앞 벤치에 자리잡고 앉았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분수를 둘러싸고 앉아 있다. 우리처럼 티라미수나 젤라토를 먹는 사람들도 있고, 연인끼리 셀카를 찍는 사람들도 있다. 티라미수를 한 입 먹는 순간... 예능 속에서 맛있는 것을 먹는 출연자의 머리 위에 팡팡 터지는 CG를 처리한 듯 내 머리 위에도 팡팡 CG가 터진다. 왜 로마에서 꼭 먹어야 할 디저트로 티라미수를 꼽는지 비로소 알 것 같다. 진한 에스프레소를 품은 푹신한 빵과 마스카포네치즈의 조화가 예술이다. 하마터면 진정한 티라미수를 맛보지 않고 로마를 떠날 뻔 했네...
이걸로는 좀 부족한데... 그럼 다음으로 뭘 먹지? 그 순간 나는 조금 전에 폼피인 줄 착각하고 줄 섰던 파스타 집이 떠올랐다. 뭔데 그렇게 많은 줄이 서 있는 거지? 이 집에 대한 정보는 우리에게 없는데... 주변을 둘러보니 그 집 파스타를 먹고 있는 사람들도 간간이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줄이다. 줄을 설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잠깐 고민하다 줄을 서기로 한다.
파스티피치오(Pastificio) 파스타 집. 이 집은 테이크아웃만 가능하다. 원래 이곳은 파스타를 파는 음식점이 아니라 파스타 생면을 파는 곳으로 더 유명한 곳. 생면 파는 상점에서 하루 2종류의 파스타를 곁들이로 팔고 있다. 2종류는 매일 매일 다른 것 같다. 오직 고를 수 있는 것은 두 종류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가격은 4.5유로. 대량으로 만들어 담아주기 때문에 긴 줄이 생각보다 빨리 빠졌다. 오늘은 카르보나라와 돼지고기가 들어간 토마토소스 스파게티이다. 내 앞에서 토마토소스 스파게티가 소진되어 연기가 폴폴 나는 갓 만든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를 운 좋게 받을 수 있었다.
다시 바르카차 분수 앞 벤치에 자리 잡은 우리들은 그토록 긴 줄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서둘러 스파게티를 먹기 시작한다.
“알덴테로 적절하게 익힌 면의 식감이 여지껏 이탈리아에서 먹은 스파게티 중 최고인데...”
생면으로 유명한 집답게 미식가인 심의 입맛을 제대로 저격한 맛이었다. (여기에서 잠깐... 나는 심이 이 집의 면에 대한 평가를 듣고 심을 진정한 미식가로 받아들이게 된다.ㅋㅋ 왜냐하면 이 집이 로마에서 생면으로 유명한 곳이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는데 심은 한 입 먹고 바로 이 집 면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여행 후 로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때 이날의 스페인 계단 앞 분수 앞에서 보낸 시간들이 함께 떠오른다. 나 역시 이때 먹은 티라미수와 스파게티에 행복해하며 흥분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 내 카메라 앵글 안에 잡힌 사람들의 모습이 더 강하게 남아 있다. 내 카메라 앵글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하나같이들 행복한 모습들이었다. 분수를 둘러싸고 앉아 있는 전세계에서 온 많은 여행객들... 어떤 이는 우리처럼 끼니를 떼우고, 어떤 이는 달콤한 젤라토를 먹고, 또 어떤 이는 오래 걸은 피로를 풀기 위해 잠시 앉아서 쉬고... 또 어떤 이는 유명한 이곳에서의 기록을 사진으로 남기고... 이렇게 제각각의 이유로 모인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어떤 과정을 거쳐 여행을 오게 된 것일까? 여행이 이들에게 주는 선물은 무엇일까?’
만약 누군가 나에게 ‘여행이 당신에게는 어떤 의미인가?’를 질문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여행은 내가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는 하나의 방법이다. 여행할 때 가장 나답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이기 때문이다.’라고. 그래서 나는 행복하게 살아가는 방법으로 여행을 떠난다. 어쩌면 내 카메라 앵글에 잡힌 이들 역시 나처럼 행복하게 살기 위한 방법으로 여행길에 나선 것은 아닐까?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이 싫어 인적이 드문 새벽에 스페인 계단을 찾았고, 뜻대로 사람들이 없는 스페인 계단을 혼자 온전히 독차지 했다. 하지만 그때는 왜 별 감흥을 느끼지 못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여행을 하다 보면 때로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빛을 발하는 곳이 있다. 그러나 스페인 계단은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더 빛을 발하는 곳이 아닐까? 스페인 계단 자체가 아니라 오드리 헵번이 젤라토를 먹어 더 유명해졌듯이 스페인 계단과 스페인 광장은 어쩌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비로소 진면목이 나타나는 장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로마에 대해 피로감이 높았던 나에게 사람들의 표정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페인 계단에서 나는 오늘 처음 로마에 온 사람마냥 로마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핀초 언덕에서 만난 톰 크루즈를 닮은 남자의 버스킹에 반하다
로마의 새로운 모습에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원래 점심만 먹고 헤어지기로 한 심이 자신도 보르게세 공원을 산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혀 또 같이 길을 나선다.
핀초 언덕으로 오르는데 피아노 소리가 점점 크게 들리기 시작한다.
“심, 버스킹을 하나 봐. 어서 가보자.”
점점 더 가까이 모습을 드러낸 버스킹 가수를 보며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성을 질렀다.
“와~ 너무 잘 생겼잖아.”
버스킹 하는 장소 주변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 남자를 보기 위해 몰려 있다. 영화 <탑건> 의 젊은 시절 톰 크루즈가 튀어나온 착각이 들 정도다. 가만히 있어도 절로 눈길이 가는 이 남자가 피아노 반주를 하며 노래를 부르다니... 이것으로도 여기에 있는 많은 여자들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한데... 어느 순간 트럼펫까지 꺼내 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식간에 이 남자의 마성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심은 벌써 이 남자의 매력에 푹 빠진 듯 3주간의 여행 기간 동안 잘 찍지도 않던 동영상을 찍으며 이 남자를 담기 위해 여념이 없다. 어린 여자아이부터 시작해 나이 많은 노년의 여자들까지... 마치 모두가 이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말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자들의 눈에 하나같이들 하트로 가득하다. 반면 함께 온 남자들의 표정은 떨떠름한 표정이다. ‘그럼... 저 얼굴에 피아노도 모자라 트럼펫까지 부는 남자를 어떻게 이길 수 있으랴...’ 극과 극의 얼굴 표정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난다.
이 남자의 매력에 푹 빠진 우리들은 결국 화장실비로 남겨놓은 유일한 현금인 2유로를 마치 마술에 걸린 듯 이 남자의 기부함에 넣고 만다.
“화장실은 참으면 되지 뭐.”
심은 한 시간째 이 남자 곁을 떠나지 못 하고 동영상을 찍고 있다. 이런 심을 찍은 나는 “웅깔이에게 이 사진 보낼 거야.”라는 협박용으로 사용하였다.ㅋㅋ
언젠가부터 여행 마지막 밤은 라이브 바에서 음악을 듣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선호해왔던 내가 어제 바리에서 그런 곳을 찾지 못해 못내 아쉬움이 컸는데, 그 바람을 이렇게 로마에서 이룰 줄이야... 그 어느 라이브 바에서 들은 음악보다 매력적인 라이브 공연을 이렇게 뜻하지 않게 핀초 언덕에서 들으며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다는 것이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설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로마가 또다른 매력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보르게세 공원에서 로마인의 삶을 마주하다
이 남자의 공연을 더 보고 싶다는 욕망이 앞섰지만 우리에게는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 우리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며 보르게세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늘 많은 사람들로 붐비는 로마와는 정반대의 모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객이 아닌 로마에 살고 있는 현지인의 진짜 삶 속으로 들어간 듯하다.
일요일의 보르게세 공원은 휴일을 가족과 즐기기 위한 로마인들의 쉼의 공간이었다. 어린 아들에게 자전거를 가르쳐주는 아빠의 모습, 롤러스케이트로 기술을 뽐내는 딸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들... 잔디밭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여고생의 모습들... 나에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1월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사람들이 벤치에 앉아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책을 읽고 있는 장면이었다. 마치 이곳만큼은 여행객들에게 내줄 수 없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곳 보르게세 공원에 와서 비로소 로마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로마에 다시 와 보르게세 공원에서 책도 읽고 자전거도 타며 하루를 빙둥빙둥 보낼 거야.”
“알라, 알라는 로마에는 더 이상 안 와도 된다고 했던 거 같은데...ㅋㅋ”
“아냐... 마음이 바뀌었어. 로마가 궁금해지기 시작했어. 로마에 꼭 다시 와야겠어.”
그런 후로도 로마는 아주 짧은 시간에 나에게 더 많은 매력을 보여주었다. 마치 ‘네가 로마에 대해서 뭘 안다고 이제는 로마는 더 이상 안 봐도 된다고 했지?’라며 나의 말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 같이...
추와의 약속 시간이 늦어 거의 뛰다시피 하며 마주했던 로마의 골목길... 5시가 넘으며 골목길에 자리 잡은 바와 카페가 하나 둘 불빛을 밝히기 시작한다. 그속에서 사람들이 술잔을 건네며, 커피잔을 건네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자꾸 내 발길을 잡는다. 이제는 정말 로마를 떠나야 하는 시간인데 말야... 마치 로마가 내게 말을 건네는 듯 했다. ‘이래도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어?’라고...
괴테는 ‘로마를 볼 때는 육체의 눈으로 보지 말고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로마는 더 이상 안 와도 될 것 같아.’라는 오만했던 나의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로마는 자신의 매력을 나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가볍게 스쳐지나가는 이에게는 쉽게 문을 열지 않던 로마가 나에게 문을 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본건 로마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하면서도 나는 트레비 분수에서 기를 쓰고 동전을 다시 던졌다. 사람들이 없는 시간대인 새벽에 찾았지만 분수 근처로 내려갈 수 없게 바리게이트를 치고 경찰이 지키고 있어 나는 부득이 멀리에서 동전을 던져야 했다. 하지만 문제는 어둑어둑해서인지. 아니면 순식간에 이루어지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내가 던진 동전이 분수 안으로 들어갔는지를 좀체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한 번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올 수 있다.’는 의미이고, 두 번을 던지면 ‘평생을 같이 할 연인을 만날 수 있다.’는 의미이며, 세 번을 던지면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의미를 갖는 동전 던지기인데... 나 역시 25년 전 동전을 한 번 던져 다시 로마를 찾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번엔 다섯 번을 던졌다. 내가 던진 동전이 분수 안으로 들어갔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 과연 내가 던진 동전은 분수 안으로 몇 번 들어간 것일까?
‘로마는 이제 마지막’이라고 하는 순간 로마가 나에게 ‘이래도?’ 하면서 로마의 속살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로마가 궁금하다. 비로소 로마의 구석 구석에 남아 있는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로마에 다시 오고 싶다. 로마를 떠나며 비로소 로마의 매력을 알기 시작한 나에게 로마는 다시 나를 받아들여줄까?
조안나 여행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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