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 첫 방문이라면...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테르미니 기차역, 내 캐리어를 사수하라!
여행 전부터 심에게는 가장 큰 걱정거리가 있었다. ‘이탈리아에 소매치기가 많다는데 아무 사고 없이 여행을 잘 할 수 있을까? 특히 소매치기로 악명 높은 테르미니역에서 캐리어를 도둑 맞으면 어쩌지?’
“알라, 테르미니역이 그렇게 위험하다며? 내가 유튜브를 보니 소매치기범이 표적을 잡은 후 기차가 떠나기 바로 직전에 캐리어를 가지고 내려 속수무책으로 당한 사람들 얘기가 있더라구. 우린 괜찮겠지?”
심은 기상천외한 소매치기 사건에 관한 여러 사례를 나에게 늘어놓으며 나름의 대비책으로 여러 아이템을 소개한다. 아무래도 심이 소매치기 관련 사건 유튜브를 너무 많이 본 거 같다...ㅠㅠ
심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난 25년 전 유럽 여행이 떠올랐다. 지금은 테르미니역에 무장한 경찰관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어 많이 안전해졌는데, 25년 전 테르미니 역은 집시들의 무법천지 무대였다. 하지만 정작 나는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당시엔 감지하지 못 한 채 무방비 상태로 해맑게 다녔다. 당시 나의 여행 준비라곤 고작 왕복 비행기 티켓, 15일권의 유레일 패스, 그리고 처음 도착하는 도시 로마에서의 한인민박 예약이 전부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떠난 무대포 여행이었기에 위험에 대한 대비책도 전혀 마련하지 않았다. 나는 테르미니 역을 시작으로 그 후로도 야간열차를 비롯해 숱하게 기차를 탔다. 아무런 잠금장치 없이 배낭을 머리맡 선반에 올려놓고 잠을 자는 것은 물론 가방을 무방비 상태로 팽개친 채 기차 타임 테이블을 보기도 했다. 한 번은 기차 안에서 한국 대학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나의 배낭을 보더니 동포애(?ㅋㅋ)에서 우러난 조언을 해주었다.
“자물쇠도 없고, 가방을 묶을 쇠줄도 준비 안하셨다구요? 정말 왕배짱이시군요. 다음 도시에 가거든 반드시 자물쇠와 쇠줄을 사서 기차 타면 무조건 치렁치렁 묶으세요. 정말 큰일 납니다.”
그런 무시무시한 조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남은 여행에서 여전히 자물쇠와 쇠줄 없이 무방비 상태로 다녔다. 아마 맥도널드 햄버거로 끼니를 떼우고 다닐만큼 가난한 여행객에게 예상 외의 경비 지출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그런 말을 듣고 나서 혹시 나의 배낭을 훔쳐갈까 전전긍긍하며 기차 안에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머리만 붙이면 아무데서나 잘 자는 덕분에 조심성이라고는 엿받고 팔아버린 양 그렇게 여전히 머리맡에 배낭을 내팽개쳐둔 채 쿨쿨 잘 잤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나에게는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여행 마니아가 된 지금 시점에서 생각하면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었던 나의 여행 초보 시절 이야기이다.
다시 이번 여행 이야기로 돌아와서... 걱정을 한 보따리 내놓는 심을 여행 고수답게 안심시키는 나.
“걱정마. 세 개의 캐리어를 한 번에 묶을 와이어와 자물쇠가 우리에게는 있어. 아무리 소매치기라도 세 개로 묶인 무거운 캐리어를 가지고 도망칠 수는 없을 거야.”
우리가 타고 갈 베네치아행 열차의 플랫폼 번호가 뜨자 심은 바삐 앞장서 걷는다. 열차 안 캐리어를 묶을 수 있는 기둥을 선점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지고... 드디어 열차가 들어온다. 신속하게 열차에 오른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캐리어 보관 선반이 보이지 않는다. 내 경험으로는 분명 기차와 기차 사이에 캐리어 보관 선반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우리가 예약한 고속열차는 각자 자리 위에 캐리어를 놓을 수 있는 여유 공간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다. 소매치기가 타겟을 잡고 대기하고 있다가 서서히 기차가 출발하려는 순간에 캐리어를 낚아채어 내리는 따위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심은 괜한 걱정을 했다며 안심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심은 캐리어를 사수하기 위해 셋이 돌아가며 불침범을 서야 하나 걱정까지 했다고 한다.
베네치아행 열차가 안겨 준 특별한 선물
캐리어의 무게로 인해 여행이 힘들 때가 있다. 내 캐리어의 바퀴가 심과 추의 캐리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튼튼하다는 이유로 공용 목욕용품을 비롯해 무거운 것을 다 담았더니 바위덩어리처럼 심하게 무겁다. 숙소에서 테르미니 역까지는 아무리 돌길이라도 평지라 그럭저럭 갈 수 있었는데 기차에 올라가려고 캐리어를 드는 순간 꼼짝도 하지 않는다. 추가 끙끙 거리며 기차에 올린다. 머리 위 선반에 올리기 위해 이번에는 나와 추 둘이서 끙끙~~ 힘겹게 올리는데 성공했는데 다시 내려야 하는 사태... 기차 안에서 신을 슬리퍼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다. 한 번은 뭣도 모르고 올렸지만 두 번은 못 올리겠다고 추가 포기 선언을 한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좌석과 좌석 사이의 공간에 쑤셔 넣는다고 넣었지만, 툭 튀어 나온 것이 통로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여간 민폐가 아니다. 끙끙대는 모습을 지켜 본 우리와 동석한 여자분이 나서서 이를 깔끔히 해결해준다. 캐리어를 눕혀 좌석과 좌석 사이에 쏘옥 안착... ‘아하~ 이게 다 요령이 있는 거였구나.’ 캐리어 정리까지 다 끝내고 나서야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아침부터 너무나 바쁜 일정을 소화한 우리들이다. 심과 추는 7시도 안되는 시간부터 바티칸박물관 관람을 위해 서둘러야 했다. 나는 비교적 여유롭게 성바오로대성당을 방문 후 수도원에서 쉬는 등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으나 기차에서 먹을 치킨을 사기 위해 들른 KFC 매장이 너무나 많은 인파로 주문이 늦어지며 막판에 허둥대느라 나 역시 정신 없는 상태였다.
서서히 기차가 출발하자 긴장 탓에 잠시 잊고 있었던 배고픔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이번 기차 여행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KFC 치킨. 오랜만에 맡아보는 치킨의 향이 끝내준다. “역시 치킨은 언제나 진리라니까...”
추는 캐리어 정리를 완벽하게 도와준 여자분에게 귀한 치킨 다리를 아낌없이 주려 했으나, 여자분은 점심을 먹었다며 거절하신다. 한 번 거절했다고 그치면 한국인이 아니지... “그렇다면 귤이라도...” 하며 귤을 내밀자 이번에는 웃으며 받는다. 이렇게 크리스티나 선생님과의 소중한 만남이 시작되었다. 자신은 파도바에 살고 있는데 크리스마스 휴가 시즌을 맞아 가족들과 로마에 여행을 왔다고 한다. 알고보니 남편과 두 아들이 다른 좌석에 앉아 있고, 티켓을 늦게 구입하는 바람에 자신만 이렇게 떨어진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오히려 해방된 것 같아 좋다고 한다. 크리스티나가 가족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남편 되는 분이 사랑의 눈길을 보낸다. 알고 보니 크리스티나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우리들도 중, 고등학교 교사라고 하자, 같은 교사라는 공통 분모에 우리의 관계는 더 끈끈해져 갔다.
크리스티나가 자신과 정반대 성격을 지닌 남편에 대해 얘기를 꺼내자 심과 추는 성격유형 검사 중 MBTI를 아느냐며 이야기의 물꼬를 이어간다. 이탈이아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MBTI 성격 유형에 크리스티나가 흥미를 보이자 심과 추는 MBTI 홍보대사를 자처하며 MBTI에 관해 열변을 토한다. 나는 ‘심과 추는 확실히 E가 맞군.’ 하며 빛을 발하는 이들의 사교성을 감탄하며 지켜본다. 저 멀리에서 낯선 동양인들과 무슨 대화 주제로 저렇게 깔깔대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남편으로부터 메시지가 온다. 크리스티나가 남편에게 MBTI에 관해 얘기를 전하자 채 30분이 안되어 남편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한다. 자신이 약식으로 MBTI 검사를 해봤는데 ‘ESFP’라고... 우리는 궁금한 것에 그치지 않고 바로 앱을 찾아 검사까지 하는 크리스티나 남편에게 박수를 보냈다. 알고보니 크리스티나의 남편은 파도바에 있는 대학 교수였다. 역시 궁금한 것을 못 참고 바로 찾아보는 것을 보니 학자가 맞군...ㅋㅋ
그 외에도 남편이 베네치아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맛집 소개를 부탁하자 왓츠(우리나라의 카톡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앱)를 통해 남편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현지인들만 아는 고급 정보를 쏟아낸다. 기필코 이 이방인들에게 베네치아에서의 좋은 추억을 남겨주고야 말겠다는 따뜻한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는 한 발 떨어져 심과 추, 그리고 크리스티나의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며 25년 전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넘어가는 열차 안에서 만난 피렌체의 멋쟁이 아줌마가 오버랩되며 떠올랐다.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넘어가는 열차의 컴파트먼트에 나랑 함께 탄 사람은 스웨덴 부부와 피렌체의 멋쟁이 아줌마다. 이 아줌마는 이탈리아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신 분이었다. 마치 홍보사절단인양 스웨덴 부부에게 베네치아와 피렌체에 대한 설명을 열심히 하신다. 나를 보자 베네치아에 가면 꼭 먹어보라며 음식까지 소개해 주신다. 직접 내 노트에 필기까지 하시며 꼭 먹어보라는데 안 먹으면 혼날 정도...
이 아줌마는 대학교수로 베네치아에 볼 일이 있어서 가시는 길이라며 내가 음식을 소개해준 것에 고마워 “그라찌에”라고 했더니 직업정신이 발동해 발음이 틀렸다며 자세히 가르쳐주신다. 더 재미있는 것은 내가 발음을 제대로 못 하자 그분이 만족할 때까지 시키는데... 발음을 열 번 정도 한 것 같다. 마치 영어 시간에 선생님이 학생에게 발음을 가르치는 식이다. 그날 발음 연습한다고 혼났다.
- '안나의 여행 이야기' 중에서 -
중딩의 막내 아들이 간간히 엄마인 크리스티나를 찾아와 볼을 부비고 가곤 했다. 저 멀리 앉아 있는 남편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며, 아내의 문자에는 하트를 잊지 않는 자상한 면모까지 드러낸다. 화목한 가족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헤어지기 전 한국에서 준비해간 김홍도의 '서당' 그림이 그려진 부채를 선물하자 너무 좋아한다. 선물을 받은 크리스티나가 가족이 있는 자리로 가 한참을 있더니 우리에게 답례로 초콜릿을 선물한다. 가족들이 각자 가지고 있던 초콜릿을 급하게 모아 선물보따리로 급조한 흔적이 역력하다.ㅋㅋ 그 안에는 아들 물건으로 추정되는 귀여운 인형의 열쇠고리까지 들어 있었다.
파도바에서 크리스티나 가족들이 내릴 때는 이미 우리와 이들 사이에는 끈끈한 정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중딩과 고딩 아들과도 따뜻한 악수를 하며 헤어졌다. 그 이후 렌트카 여행을 하며 파도바라는 이정표를 볼 때마다 따뜻한 미소의 크리스티나 선생님이 떠올랐다. 크리스티나 선생님 가족과 사진을 찍지 못 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너무나 따뜻한 크리스티나 선생님 가족과의 만남은 기차 여행이 우리에게 안겨 준 특별한 선물이었다.
여행은 이렇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뜻하지 않은 순간에 나에게 선물을 건네곤 한다.
조안나 여행을 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