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JO Sep 26. 2023

17 달리면 보이는 것들

시민 가득 찬 군산공설운동장.

두 눈을 질끈 감고 출발 총성을 기다렸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이었는가!

여기저기서 준비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힐끗힐끗 쳐다보는데 자신감이 뚝 떨어졌다. 풀코스에서 5km 건강 마라톤에 이르기까지 여러 코스 중에 왜 무모하게 풀코스를 선택했는지 잠시 후회가 되었다.  

다른 사람보다 한 발짝이라도 먼저 출발해 보려고 맨 앞으로 비집고 나가는 순간 총성에 화들짝 놀랐다. 이등병 때 신물 나게 들었던 그 소리를 다시 들으니 먹먹해진 심장이 중대장처럼 명령을 내렸다. ‘출발, 너는 할 수 있다.’


반복되는 안내방송에 몇 번이고 매트를 밟은 후에야 안심하고 뛰어나갔다. 200m를 달려 운동장 정문을 빠져나가려는데 숨이 턱 막혔다. 많은 시민들이 들꽃처럼 길 양쪽으로 늘어서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보내고 있는데 발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한 달 전부터 직원들에게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한다고 큰소리치고 내일은 휴가까지 냈는데…….   호흡을 가다듬고 하늘을 보았다. 겨우내 호강했던 먹구름은 길을 잃었고 찬란한 봄 하늘도 마냥 즐거운 듯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른발을 힘껏 내디디며 이를 '악' 물었다. 약간 속도를 냈다. 발걸음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이대로라면 금강산 꼭대기를 박차고 신의주까지도 한 달음에 달려갈 것 같았다. 5km쯤 달렸을까. 아랫배에 중압감이 밀려오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붕괴 조짐까지 감지됐다. 이 무슨 불상사인가. 수험생처럼 만반의 준비를 다한다고 호들갑을 잔뜩 떨었는데. 이를 어쩐다? 휙 지나가는 노련해 보이는 아저씨에게 해결방법을 물었더니 너무 싱겁게 대답한다. 퍼내야지. 뭘 어떻게 해. 아, 그렇구나. 


한국 최고기록 2시간 7분 20초. 현재 컨디션으로는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 10킬로미터 통과시간을 보니 56분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너무 늦었잖아.’

물을 한 컵 낚아채 반 모금 마시고 도로가 쪽으로 힘껏 던졌는데 손이 빠지는 줄 알았다. 서서히 숨이 가빠오고 장딴지에 무게감이 밀려왔다. 이제 고작 4분의 1 뛰었는데 지친다고 생각하니 까마득했다. 무모한 도전인가. 큰소리부터 치는 나 자신이 미웠다. 20km까지 2시간을 목표로 정했다.      

가만히 한 달간의 연습 과정을 떠올려 보았다. 선배의 동아마라톤 완주 자랑에 도전을 선언하고 연습에 들어갔다. 연습 첫날 100미터도 채 달리지 못하고 숨을 헉헉거리며 걸었다. 시작은 언제나 힘들다. 조용히 포기할까. 며칠간 나 자신과의 줄다리기가 이어졌지만 선택은 포기가 아닌 도전이었다. 

매일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탐진 강변을 달렸다. 강가라 그런지 짙은 안개가 단단하게 진을 치고 있는 날들이 많았다. 그것이 내 미래를 가로막고 있는 벽으로 느껴졌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날들을 나는 벽 앞에서 좌절했던가. 그 벽의 이름은 열등감이었다. 크고 작은 벽들이 ‘넘을 테면 넘어봐’라고 잔뜩 인상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통과하지 못하면 이 벽들은 더 신이 날 것이다. 나는 이 벽을 뛰어넘기로 마음먹었다. 


속도를 내 봤다. 한참을 달렸는데 꿈속처럼 편안했다. 아무리 속도를 내도 숨이 차지 않았다. 서서히 안개가 걷혔다. 어쩌면 그 벽들은 내가 겁먹고 세워놓은 한계였다. 마치 어린 코끼리가 자신을 매어놓은 강한 말뚝에 길들여져 거대한 몸집이 되어서도 그 말뚝을 벗어날 생각을 못하는 것처럼. 내 전력질주에 벽들이 차례대로 무너져 내렸다.      

저녁에는 공설운동장 외곽을 20바퀴씩 돌았다. 짧은 연습 기간에다가, 중간에 축구 시합하다가 종아리를 세게 채여 일주일간 연습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5월인데 벌써 태양이 뜨거웠다. 20km 지점이다. 초코파이와 물이 보였다. 두 개를 덥석 들어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이렇게 달콤한 초코파이는 처음이었다. 뛰는 내내 하나 더 못 먹은 아쉬움에 달리기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20km를 2시간에 주파했고 계획대로 잘 되어 가고 있었다. 마의 30km 지점.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등에 ‘4시간’이라고 써 붙여진 여자 페이스메이커를 따라붙으며 욕심을 냈다. 이미 한국 신기록은 포기했기에 완주를 목표로 재수정했다. 페이스메이커를 따라가다 보니 점차 내 페이스가 흐트러졌다. 뛰어도 뛰어도 30km 지점이 보이지 않았다.      


잠시 걸어보았다. 걷기조차 힘들었다. 도로변에 잠깐 앉아보았다. 엊그제까지 수줍어하던 벚꽃들이 오늘은 막무가내로 시끄럽다. 파릇파릇한 보리들이 힘차게 솟아나고 있었다. 힘차게 팔을 흔들어 보았다. 발끝에서부터 모든 세포들이 일제히 정신을 차린 듯 온몸에서 힘이 느껴졌다. 다시 달렸다. 옆 사람에게 들리지 않게, 속으로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대며 내달렸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는 것이다. 크든 작든 도전은 아름답다. 휠체어를 타고 풀코스를 완주하는 사람들. 목발을 짚고 도전하는 사람들. 70의 나이에도 벌써 10번째 풀코스를 도전한다며 나를 일으켜 세우시던 그 할아버지의 담대한 눈빛. 그들을 보는데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조그만 실패에도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려 했다. 늘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열등감의 집을 짓고 힘들어했다. 휙휙 나를 추월하는 사람들. 내가 이기려는 것은 저 사람들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빠르고 느리고 가 무슨 상관인가!

      

내가 두려워할 것은 느림이 아닌 ‘멈춤’이다! 


이제 뒤는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꼴찌면 어떠하랴. 나 자신에게 한 약속을 지키면 되는 거지.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앞을 지나친다. 35km 지점.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았다. 포기할 것인가, 나아갈 것인가. 다시 잠시 앉아보았다. 단단해진 종아리는 이제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풀코스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구나. 기어서라도 5시간 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면 모두 철수하고 교통통제도 해제한다고 했는데. 이를 악물고 물 묻은 스펀지를 온몸에 문지르고 나를 밀고, 끌고 다그쳤다      

드디어 40km. 골인 지점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들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출발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골인 지점을 향했다. 난생처음 느껴보는 이 카타르시스. 메인스타디움 전광판 시계를 보니 4시간 35분을 향하고 있었다. 트랙에 들어섰다. 아내가 먼저 나를 알아보고 환호성을 지르며 아들과 함께 오고 있었다. 잠깐 멈췄더라면 눈물을 보일 것 같아 맹렬히 달렸다. 무슨 생각을 했던지 손도 치켜보지 못하고 골인 지점을 통과했다. 아들을 번쩍 들어 올렸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가로막는 많은 벽 앞에 직면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외모나 건강이 벽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이 벽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자라난 환경이나 나약한 정신이 벽이 되기도 한다. 그 벽 때문에 자주 상처받고 괴로워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그 벽은 무너졌다가도 또 소리 없이 똬리를 틀고 나타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벽들이 때때로 자신을 더 강하게 단련시키고 성장시키는 선물이 될 수 있다. 벽 앞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용기를 내어 부딪혀보자.

오늘 나는 내 앞의 벽을 힘차게 뛰어 넘었다.      

  


           


작가의 이전글 16 슬기로운 9급 공무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