秋甲寺, 思秋期에 든 여인
갑사는 계룡산의 여러 명소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산책 코스다. 가을 풍경이 특히 화려하고 아름다워서 추갑사(秋甲寺)라고 부를 만큼 명성이 자자하다. 그 유명한 갑사 단풍의 절정을 나는 여고 졸업 30주년 행사를 치르던 해에 딱 한 번 보았다.
그 행사는 내 인생의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오랜만에 만난 유년의 친구들로 인해 나의 과거와 현재가 마구 뒤엉켰다. 현실의 내가 참인지 과거의 내가 참인지 몰라 헤매고 있을 때, 그녀가 불쑥 찾아왔다. 우리는 늦가을 햇살을 따라 무작정 길을 나섰다.
공주에서 계룡산 자락을 넘어와 신원사와 갑사로 갈라지는 길목에서부터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 넓지 않은 길 양옆에 가로수로 심어 놓은 은행나무가 색이 덜 든 잎 하나 없이 샛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영화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황홀했다.
그건 갑사에서 벌일 어마어마한 색의 향연 중 서막에 불과했다. 일주문 입구에서 대웅전까지 말채나무, 갈참나무, 졸참나무, 단풍나무, 느티나무, 때죽나무, 풍게나무, 팥배나무, 고로쇠나무, 고욤나무, 산수유, 쉬나무, 회화나무, 목백일홍, 황매화, 대나무 등이 다채롭게 빛나고 있었다.
나무 하나하나의 색깔도 곱거니와 여러 나무가 함께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색감은 도저히 사람이 그려낼 수 있는 풍경화가 아니었다. 그 오묘한 조화에 매료되어 탄성이 절로 나왔다. 천국에나 가야 볼 것 같은 풍경을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내가 스무 살 때 좋아했던 그 사람, 너도 기억하지? 실은 내가 얼마 전에 그를 만났어. 헤어진 지 30년 만에, 정말로 우연히 연락이 닿았단다.”
한적한 벤치에 앉아 물 한 모금 마시려는데, 그녀가 먼 산을 보며 불쑥 말을 꺼냈다.
우린 그때 둘 다 연애는 처음이었단다. 순진한 애들이 정말 미치도록 열렬히 사랑했지. 그는 결혼까지 가길 원했지만 나는 아니었어. 둘의 성향이 너무 똑같아서 그랬는지, 나는 종종 숨이 막혔거든.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편안하지 않은 사람하고 평생을 같이 가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오랜 고민 끝에 나는 그가 군 복무 중일 때 일방적으로 소식을 끊어 버렸어.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헤어지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도망쳤던 거야. 그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 아마도 운명의 신이 나를 다른 데로 이끌 계획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야.
내가 떠나고 난 후, 그가 오랫동안 폐인처럼 지냈다는 후문이 들렸어. 그렇게 나를 좋아하던 사람인데, 하필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냉정하게 그런 건 정말 미안했어. 그래도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지 않고, 좋은 감정이 있을 때 헤어지길 잘했다고 애써 자기합리화 했지. 여하튼 우린 각자에게 어울리는 길을 찾았고, 여기까지 열심히 걸어왔어.
쉰 고개를 넘고 나니, 이제는 나도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더라. 연애 세포 같은 건 이미 다 퇴화해 버린 줄 알았지. 오랜만에 동창회에서 만난 친구가 그의 전화번호를 주면서 연락해 보라고 했을 때, 나는 아무 감정 없이 덤덤하게 볼 수 있을 줄 알았어. 정말로 -
그런데 막상 만나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
처음엔 중년이 된 그가 자기 아버지랑 똑같아서 깜짝 놀랐어. 어둑한 주차장에서 나를 보고 손 흔드는 그가 내가 상상하던 청년이 아니라서 당황했지. 어색해서 악수나 하자고 내민 내 손을 그가 확 잡아당기더니, 그때처럼 꽉 끌어안았어. 그 순간, 어이없게 내 마음이 후진기어를 넣고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어. 첫 키스를 했던 30년 전 그 순간으로 순식간에 되돌아가는 거야. 글쎄 ~ 그 느낌이 우리가 열렬히 사랑하던 그때처럼 여전히 황홀하고 짜릿해서 정말 당황스러웠어.
오랫동안 풀지 못한 그의 갈망을 알면서도 나는 애써 또 외면하고 말았단다.
그런데 말이다. 분명 오래전에 헤어진 사람인데, 평생 같이 살아온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지는 건 또 무슨 착각이니? 정말 혼란스러웠단다.
황급히 서둘러 작별을 하고 미친 듯이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이 복잡하더라. 이 나이에도 이리 쉽게 연애감정이 복원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 우리가 아직 덜 늙은 줄도 모르고 섣불리 다시 만났다고 나 혼자서 백번도 더 후회했어.
근데 있잖니. 얼떨결에 아주 잠깐 스무 살 마음으로만 돌아갔다 온 것뿐인데 내가 아주 확 달라졌어. 그날을 생각하면 괜히 가슴이 터질 것 같이 설레고, 바싹 말라 가던 내 속에 다시 물이 차오르는 기분이야. 회춘 묘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다시 스무 살로 돌아가는 것처럼 젊어지는 거 있지.
그녀는 밑도 끝도 없이 선문답 하듯 툭 내뱉고는 스스로 어색한지 저만치 걸어갔다.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가을빛 속으로 스며들어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는 온 사방이 어둑하도록 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다시 스무 살이 되어 버린 그녀의 로맨스 이야기를 듣고 또 듣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평생 모범적인 조강지처로 충실히 살아온 그녀 입에서 이런 아침드라마 대사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고 보니 그녀의 옷차림이며 표정이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어딘지 모르게 세련되고 생기가 돌았다. 눈빛도 확 달라졌다.
갑사에서 나오는 길에 운전하면서 보니, 그녀가 눈을 감고 있다. 혼자서는 주체할 수 없이 벅찬 마음을 내게 다 털어놓고 나니 피로가 몰려오는 모양이다. 하기야 30년 전 이야기부터 지금 상태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쉬지 않고 이야기를 해댔으니 피곤하기도 하겠지.
그를 또 만날 거냐는 내 물음에 그녀는 펄쩍 뛰며 손사래 쳤다. 앞으론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선물처럼 다가온 그 짜릿한 기억만큼은 죽을 때까지 간직할 것이라고 했다.
이 또한 우리가 아직은 젊다는 증거리라.
아주 충분히 늙고 난 후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다시 물이 차오르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이런 마음이 남아있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고 기뻐할 일이리라.
어느새 잠들었는지 그녀의 숨소리가 고르다. 순진한 쉰 살 범생이의 어설픈 일탈에 덩달아 설레던 내 마음에서도 바람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가로등도 없고 달도 없이 어두운 길을 달리다 보니 괜히 씁쓸하고 착잡해진다.
눈물이 핑 돌았다. 애매하게 늙은 나이 탓인지, 너무 황홀한 갑사의 단풍 때문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