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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재 Nov 12. 2024

주는 대로 받아야 하는

“덤 좀 많이 주세요”       


  나도 모르게 불쑥 말하고 보니 입이 참 부끄럽다. 필요한 만큼 돈을 더 주고 샀으면 좋았을 일이다. 염치없이 덧거리를 많이 달라는 내가 딱했는지 채소 장수 아주머니의 뭉툭한 손이 마지못해 마대를 뒤진다. 꼬부라지고 못생긴 파치를 한 움큼 꺼내 봉투에 담는다. 돈 주고는 절대로 사지 않을 물건도 이렇게 덤으로 얻으면 불평할 수가 없다. 나는 수지맞은 것처럼 그저 감지덕지하며 받는다.     

 

  사실, 덤으로 받아온 파치는 제때 먹지 못하고 버릴 때가 더 많다. 냉장고 속에서 이리저리 굴리다 보면 음식물 쓰레기통에 돈 내고 버리게 된다. 이제는 아이들도 전부 장가가고 없는데, 여전히 덤 좀 많이 달라고 하는 나는 덤(Dumb)이 분명하다.     


  단골 과일 트럭 아저씨는 내가 고른 과일 무더기를 검정 비닐봉지에 다 담고는 따로 놓은 상자에서 못생긴 놈을 하나 슬쩍 더 집어넣으며 싱긋 웃는다. 아저씨의 덤은 돈을 다 주고 사면서도 선물 받는 기분이 들게 하는 고도의 장사기술이다. 덕분에 나는 묵직한 검정 봉지를 가뿐하게 들고 걷는다. 좋은 기분까지 덤으로 챙겼다.     


  ‘벌도 덤이 있다’는 속담이 있다. 벌을 받을 때도 덤으로 더 받는데 하물며 물건을 살 때 덤을 얻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이다. 그만큼 덤을 좋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물건 살 때만 덤이 있는 게 아니다. 살다 보면 때때로 시간도 고생도 축복도 덤으로 받는다.      



  고교 동창생 단체 카톡방에 부고가 떴다. 친구 어머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소식이다. 그분은 내게 그냥 친구 어머니가 아니었다. 평생 존경하고 흠모하던 분이었다. 하지만 객지를 떠돌며 사느라 바빠서 오랫동안 찾아뵙지 못했다. 이제야 겨우 고향 가까이 오게 되었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섣불리 뵈러 가지 못했다. 그래도 친구랑 통화할 때마다 어머니 안부는 꼭 물었다. 오랜만에 어머니 모시고 맛있는 식사 한 번 대접하러 가겠다고도 했다. 진심이었다.     


  주변머리가 변변치 못하여 차일피일 벼르다가 보니 결국 이렇게 국화 한 송이로 인사하게 되었다. 어리석게도 또 한발 늦고 말았다. 빈소에 걸린 영정 속 어머니는 여전히 곱고 단아하셨다. 죄송한 마음이 목에 콱 걸렸다.     


  친구의 어머니는 내게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여고생이 막연히 그려보던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다고나 할까. 세상에서 가장 상냥하고 친절한 여성의 대명사였다. 어머니는 딸의 친구들에게도 커다란 교자상을 펴고 대접하는 분이셨다.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정성껏 차려내시는 모습이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른다. 그런 어머니의 딸인 친구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가난하고 각박하던 1970년대에 받은 환대라 더욱 매료되었고, 지금까지 선명하게 남았다.     




  우리가 고3으로 올라가는 해 1월에 어머니는 느닷없이 홀몸이 되었다. 어머니 나이 서른아홉, 막내인 여섯째 딸은 겨우 네 살이었다. 친구네 아버지는 경찰공무원이었다. 지방으로 발령받아 임지로 간 첫날, 숙소에서 혼자 주무시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변을 당하셨다. 유난히 가정적이고 듬직하던 남편은 젊은 아내와 딸 여섯을 남겨놓고 영영 떠났다. 졸지에 튼실하던 울타리가 와르르 무너졌다. 가장家長이 지고 있던 모든 짐은 어머니 등으로 옮겨졌다. 버겁도록 무거운 책임감과 함께 외롭고 막막한 세월이 덤으로 따라왔다.     

 

  당장이라도 남편을 따라가고 싶을 만큼 눈앞이 캄캄했다. 하지만 어린 딸들만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바깥 일은 전혀 모르고 남편 그늘에서만 살던 터라 혼자 헤쳐나갈 일이 아득하기만 했다. 그래도 자식들을 건사하며 어떻게든 살아내야 했다.      



  서른아홉 살부터는 그저 엄마 역할에만 충실했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깔끔하고 반듯한 삶이었다. 딸 여섯을 모두 대학까지 보내고, 각자에게 맞는 짝을 골라 떠나보냈다. 딸들을 결혼시키고 서운해할 새도 없었다. 직장에 다니는 딸을 도와 외손주들 돌보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텅 비어버렸던 어머니의 둥지는 다시 북적거렸다. 손주들은 물론 동네 꼬마들도 좋아하는 친절하고 예쁜 할머니가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머니는 날마다 조금씩 사위어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할머니 품 안에서 꼬무락거리던 손주들은 눈 깜짝할 새에 어른이 되어 떠났다. 직장에 매여 동동거리던 딸들도 정년퇴직했다. 원래 날씬하던 어머니의 몸은 점점 더 앙상해졌다. 딱히 먹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일도 없어졌다. 거동은 느릿해지고 생활 반경도 확 줄어들었다. 느슨해진 기억 주머니 속엔 오래 묵은 이야기만 남았다. 오십 년 전 이야기는 어제 일처럼 또렷한데, 방금 한 이야기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어머니가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은 입버릇처럼 수시로 드리는 기도였다. ‘끝까지 내 손으로 밥 먹고, 내 발로 화장실 다니게 해주세요.’ 매우 간결하면서도 현실적으로 절실한 소원이었다.      


  그 기도 덕분이었을까. 어머니는 평생 중환자실 신세를 진 적도, 요양병원에 입원할 일도 없었다. 평생 해온 살림살이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욕심 없고 규칙적인 일상을 영위하면서 어머니는 점점 더 가뿐해졌다. 


  노쇠老衰. 


  천천히 소멸해가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본인 손으로 밥을 드셨고, 혼자서 화장실에 가셨다. 다들 앞으로 몇 년은 거뜬히 더 사실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느 날 문득, 아무런 예고도 없이 떠나셨다. 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온한 모습으로 깊이 잠드셨다. 향년 91세, 요즘 보기 드문 고종명考終命 이었다. 누구나 원하는 마무리지만, 쉽게 받을 수 없는 축복이었다. 그때 덤으로 받은 그 모진 세월을 잘 견뎌냈다고, 그분께서 마지막 선물로 주신 모양이다. 참으로 부럽고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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