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느린 어른의 이해」
이 글은 감각이라는 이름으로 버텨낸 한 아이의 기록이다.
이 기록은 누군가의 고통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침묵 속에서 들려오는 생존의 언어를 복원하려는 시도이다. 살아남기 위해 아이들은 말을 바꾸고 침묵을 택한다. 어른인 우리는 침묵 속에 어떤 질문을 하지 않았는가를 돌아봐야 한다.
막대사탕을 한참 전 인터넷에서 대량으로 사 두고 잊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집으로 돌아가는 용주가 그 사탕 을 발견해냈다.
"먹어도 되는데, 알지? 이 교실에서 뭔가를 먹으려면 무언가를 해야 해."
용주는 들고 있던 사탕을 툭 내려놓았다.
“그런데 뭐든 해도 돼.”
아이 앞에는 휴지 한 장이 있었다. 용주는 휴지를 집어 올렸다가 천천히 내려보내며 흘림을 관찰했다. 조용한 집중의 신호였다.
“용주야, 휴지가 내려가는 모습을 같이 볼래?”
아이는 한 장을 더 뽑아 보여주었다. 괜시리 결연한 표정이었다. 물티슈도 한 장 뽑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됐죠. 선생님, 저 휴지 뽑았어요.”
단순하고 다소 무뚝뚝한 저 말이 이 아이들에게는 쉽지 않은 시작의 표시인 걸 나는 안다. 무기력으로 침묵하던 아이가 자신의 감각을 꺼내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감각놀이는 번거롭다. 쌀알을 만지게도 하지만 치우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종종 휴지를 뽑아 흘려보내는 놀이로 시작한다. 그날 문득, 용주에게는 이런 경험조차 충분히 주어지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설에서 지내는 동안 여러 기관을 거쳐 온 용주. 성장기에 결핍과 방치를 견뎌온 흔적이 보였다. 그런데 지금 손끝에서 휴지가 쑤욱 올라오는 감각에 입술이 길어지며 놀라는 용주는, 마치 처음 세상을 만나는 아주 어린 아이처럼 보였다.
“용주야, 네가 느끼는 걸 손안에 꼭 쥐었다가 천천히 흘려보내볼까?”
나는 시범을 보였다. 휴지는 먼지처럼, 나비처럼 너풀거리며 바닥에 내려앉았다. 용주는 소리 없이 또 한 장을 뽑았다. 이번엔 떨어지는 휴지를 중간에 잡아보려 몸을 비틀며 따라갔다. 이윽고 다른 아이들처럼 알 수 없는 꺅꺅 소리를 내며, 한 시간 내내 무언가를 계속해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나는 용주를 불러 세워 사탕을 건넸다.
“오늘 너 해냈잖아.”
"야 너 왜 이렇게 식은땀을 흘려"
"선생님 용주 또 침 뱉어요!"
3주 전부터 용주는 식은땀을 많이 흘렸다. 그리고 종종 손바닥을 바지 옆단에 문질렀다. 어느 날은 옷이 젖어 피부에 달라붙을 정도였다.
아동 7명과 집단 상담을 하던 날, 아이들은 상상 속 친구에게 보여줄 자기소개를 그렸다. 대부분 밝은 그림이었지만, 용주는 깊고 어두운 바다와 거대한 형상을 그렸다. 그 앞에 점처럼 작은 인물이 서 있었다. 두 손을 불끈 쥐고 맞서는 모습. 형상은 압도적인 입구를 벌리고 있었고, 작은 인물 쪽으로 압박을 가하는 선들이 뻗어 있었다.
“이 장면에서 용주는 누구일까?”
용주는 종이를 구겨 없앴다.
우리는 주제를 바꿔 미래의 집을 그렸다. 용주는 1·2·3층을 정성스레 그리더니 지하 1층부터 지하 6층까지 덧붙였다. 마지막 지하층에는 천장과 벽에서 뻗은 굵은 선들이 있었다. 뿌리인지, 덩굴인지, 설명되지 않은 것들이었다. 작은 인물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용주야, 이 지하는 어떤 공간이야?”
“여기는 비밀. 아무도 모르는 곳이에요. 샘한테도 말 못 해요.”
상담 기록과 치료 장면을 기관과 공유했다. 주저 끝에 관련 기관들의 확인을 거쳐, 같은 시설의 형과 사이에서 용주의 개인적 경계가 무너진 일이 있었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그 후 두 아동은 즉시 분리 보호되었고, 관련 사안은 법적·행정적 절차로 이관되었다.
두 아이 모두 내가 돌보던 아이들이었다.
상황을 알게 된 뒤, 나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기관과 협의했고,
결국 직접 신고와 진술서를 통해 피해 아동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그 결정은 나에게 단순한 선택이 아니었다.
한 아이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아이의 어둠과 마주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그래서 이 일은 내게 처벌보다 돌봄의 윤리를 되묻는 사건으로 남았다.
그런 용주는 이후 기관의 면담 과정에서 ‘그냥 같이 놀았을 뿐’이라 말했다. 그 말은 스스로를 지키는 방식이자 그 아이가 가진 언어의 마지막 방어선처럼 들렸다. 그 말 속에는 침묵으로 살아남아야 했던 시간들이 전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감각은 말보다 빠르고 잔상이 오래 남는다.
한 아이를 보호하는 일이, 다른 아이를 버리는 일이 되어야 할까?
이것이 사회의 법칙이라면,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상황이 정리된 후에도 두 아이의 얼굴이 번갈아 떠오르며 자책하고 되짚어보는 날이 이어졌다.
용주는 자신은 형에게 아무 일도 당하지 않았으며 그저 같이 놀았을 뿐이라고 했다. "이건 감각 놀이일 뿐이에요." 용주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또박또박 말했다. 휴지를 뽑으며 낄낄대던 그날처럼, 가벼운 놀이였다는 듯이.
어떤 아이들은 감각을 차단하고, 어떤 아이들은 침을 뱉으며 저항한다. 그리고 용주는 결국 이 감각에 "놀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날 휴지를 뽑으며 웃던 아이가, 이제는 상처 입은 몸을 지키기 위해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손에 의해 왜곡된 감각을 다시 회복하는 일은 가능하긴 한거지? 라는 경험해 본 적 없는 고민속에 며칠이 흘렀다. 수업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스르륵 열린 문 틈으로 용주가 조심스럽게 고개만 빼꼼 내밀고 물었다.
"선생님, 여벌옷 있어요?"
바지가 젖어버린 아이. 검사 결과 추가 이상은 없었다. 연이은 극단적 스트레스에 실수하는 일이 잦아졌다. 더는 바꿔줄 여벌옷이 남아 있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옷을 챙기며 용주의 사이즈를 떠올렸다. 그러자 그 때 그 작은 어깨의 무게가, 그제야 실감났다.
아무렇지 않은 듯 버티던 그 아이가 한참이나 어린 내 아이와 같은 사이즈 옷을 입는단 사실이 나를 순식간에 무너뜨렸다. 눈물은 터졌고, 그 순간 나는 울 수밖에 없었다.
그날 휴지를 뽑으며 웃던 그 아이는, 이제 상처받은 몸을 지키기 위해 마치 작은 성을 쌓듯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건 감각놀이일 뿐이에요.’
감각은 말보다 빠르고 잔상이 오래 남는다.
용주는 상처 받은 감각에 놀이라는 이름을 붙여 침묵으로 살아남았다. 그 말 속에는 설명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었다. 동시에 그 침묵을 안전하게 풀 질문을 건넬 어른이 더 필요했다. 우리는 언어 없는 말을 진짜 언어로 번역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신호를 알아채는 어른들이 아이의 곁에 있어야 한다.
언젠가 용주가 다시 휴지를 뽑아 들겠지.
그게 장난일 수도, 그저 심심함일 수도 있다.
나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을 것이다.
그 순간이 용주에게 조용히 숨을 고를 틈이 되기를 바라며, 나도 함께 숨을 고를 것이다.
그리고 나 아닌 다른 어른들도 용주 곁에 그렇게 서 있기를 바란다.
어제는 피해자였던 아이가
오늘은 또 다른 아이를 아프게 했다면
당신은 증인으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당신의 자녀가 다른아이를 해쳤다면
그때도 당신은 증인이 될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