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만났다

Prologue

by 비지대디





"넌 주말에 뭐 해?"

"넌 잘하는 건 뭐야?"

"넌 좋아하는 건 뭐야?"



난 서른다섯이다.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하고 국립박물관에서 계약직 연구원으로 근무 중이다. 국공립 박물관 정규직 큐레이터가 되는 것이 꿈이고 이를 위해 경력과 스펙을 쌓고 있다. 얼마전에 국가공인 큐레이터 자격증도 땄다. 이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목표에 이를 것 같은 마음에 뒤도 안보고 달리는 중이다.

잘하는거? 좋아하는거? 딱히 내세울만한 취미나 특기는 없다. 스포츠나 게임도 그리 좋아하지 않고, 영화나 독서도 뭐 그저 그렇다. 주말이면 집에서 TV를 보거나, 동네 친구들과 술 한 잔 하는 게 전부다.

성인이 되기까진 대학을 목표로 살다가, 성인이 되어서는 직업을 목표로 살았다. 무엇이 되기 위해 살다 보니, 뭘 좋아하는 지도, 뭘 잘하는 지도 모르는 30대를 살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살았다.

그러다가 아내를 만났다.






그녀는 서른둘이다. 그녀는 국제대학원을 졸업하고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공공기관에서 일한다. 그녀는 아날로그형 집순이다. 은행 ATM기에서 금융거래를 하며, SNS는 하지 않는다. 외출복보다 수면바지가 많고, 서점과 문구점이 그녀의 힐링 장소다. 삶의 밝은 면을 바라보며 남들과 비교하지 않는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느리지만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그렇게 그녀는 '무엇을 하기 위해' 살았다.

그러다가 '무엇이 되고 싶은 남자'와 '무엇을 하고 싶은 여자'가 만났다.


무엇이 되고 싶으나 그 무엇이 되지 못한 나에게 결혼은 현실이었다. 무엇이 되기 위해 살다 보니, 정작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몰랐다. 박봉의 계약직이었지만 부모님과 지냈기에 그럭저럭 살아왔지만, 결혼을 하고 나니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목돈이 없어 신혼살림을 월세 원룸에서 시작하게 되자, '무엇이 되기 위해' 살던 삶에 의미가 사라지고 '어떻게 먹고살지'라는 고민이 다가왔다. 막연히 정규직만 되면 행복할 거라며 버티던 미래가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꿈을 좇아 달렸던 삶에 콩깍지가 벗겨졌다.


‘정규직이 된다 한들 원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이를 낳으면 차라도 한대 살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앞이 보이질 않았다. 결국 난 10년 동안 좇았던 꿈을 접고 아버지에게 일을 배워 작은 가게를 차렸다.


그렇게 나는 '먹고살기 위해' 살았다.

그러다가 윤슬이를 만났다.






아버지로부터 1년 정도 일을 배우고 첫 가게를 차렸을 때, 딸 윤슬이가 세상에 나왔다. ‘햇빛 달빛 비치어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뜻의 한글이름을 지어주었다. 난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좋은 남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난 주말 없이 일했다.

1년 후엔 두 번째 가게를 차렸다.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난 주말 없이 일했다.

또 1년 후엔 세 번째 가게를 차렸다.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난 주말 없이 일했다.

월세 원룸에서 월세 아파트로 옮기고 차도 한 대 샀다. 그러다가 덜컥 작은 집도 샀다. 차도 사고 집도 사면 좋은 아빠가 될 줄 알았다. 좋은 남편이 될 것 같았다. 대출이자에 할부에 허덕이게 되자, 더욱 더 주말없이 일했다. 아니 일할 수 밖에 없었다. 윤슬이가 첫돌이 될때까지 우리 가족은 함께 주말을 보낸 적이 없었다. 대부분 아내가 독박 육아를 한셈이다. 그러나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 결국 아내는 15개월의 육아휴직 기간을 거의 홀로 윤슬이를 돌보다가 복직을 했다.


그렇게 나는 윤슬이를 만났지만 '먹고살기 위해' 살았다.



아내가 해외출장을 가게되었다. 22개월의 윤슬이를 혼자 보게 되었다. 처음으로 둘만 보내는 시간이라 긴장되었지만 설렘도 컸다. 이번 기회에 동네에서 유명하다는 키즈카페도 가볼 생각이었다. 셀렘 반 두려움 반으로 하루를 시작했으나, 기저귀 몇 번 갈고 밥 먹이고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하니, 불과 아침 10시도 안 되었는데 정신이 혼미하고 체력도 바닥났다. 그래도 기필코 키즈카페를 데려가야겠다는 마음은 확고했다. 그런데 외출할 때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머리에 팍팍 그려지지 않아 허둥거리기만 하고 진도가 안 나갔다. 그런 나 자신이 답답하고 짜증 나서 한숨이 나왔다. 미안함에 윤슬이를 바라보니 윤슬이가 천천히 해도 된다는 듯 씩 웃는다. 오랜만에 시간을 보내는 아빠를 위한 배려이자 응원 같았다. 응원의 미소를 받으니 마음이 차분해졌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진한 커피를 한잔 때려 넣고 가방을 챙겨 키즈카페로 향했다.


키즈카페에 도착하자 윤슬이는 신이 나서 뛰어다녔고, 난 행여 아이가 다칠까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녔다. 윤슬이가 좋아하는 모습에 나름 뿌듯했지만, 아이에게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으니 슬슬 체력의 한계가 왔다. 그런 와중에 아이에게서 구린 냄새가 났다. 이런 올 것이 왔구나. 엉덩이 쪽을 살펴보니 뭔가 두둑하고 묵직한 것이 곧 터질 것 마냥 으르렁대고 있었다. 윤슬이를 재빨리 안고 수유실로 들어갔다. 기저귀를 벗기려는데 과정이 익숙지 않아 잠시 머뭇거린 사이, 아이가 움직이는 바람에 똥 묻은 기저귀가 뒤집혔다. 한 손으로는 아이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뒤집힌 기저귀를 수습하다 보니 손은 똥범벅이 되었고, 그 손으로 다시 물티슈를 집으려다 보니 물티슈에도 똥이 묻고 그야말로 난리였다. 기가 막힌 상황에 헛웃음이 나왔다. 진정한 똥손으로 거듭난 순간이었다. 가까스로 수습하고 겨우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아이와 있으면 뭘 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고 돌발 상황이 생기면 신속히 해결할 수 없는 바보 같은 아빠. 먹이고 입히는 것조차 서툴고 힘에 부쳐 아이의 감정은 들여다볼 여력도 안 되는 부족한 아빠. 부끄러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그렇게 나는 반쪽짜리 아빠로 살았다.


그러다가 우즈베키스탄을 만났다.






세 번째 가게를 오픈한 지 6개월인가 되었을 때, 아내가 우즈베키스탄 사무소에 자리가 났다며 지원해보고 싶다고 했다. 늘 현장에서 일하고 싶어 했다는 걸 잘 알기에 그러자고 했다. 현실적으로 당장 해외사무소를 나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아내에게는 흔한 기회가 아니었고 설령 지원을 한다고 해도 100% 합격한다는 보장이 없었기에 지원 조차를 반대하는 것은 현명한 것 같지 않았다.


그렇게 아내는 우즈베키스탄 사무소에 지원을 했고, 드라마처럼 합격을 했다. 합격 통지가 5월이었는데 7월 말에 우즈베키스탄으로 가야 한단다. 아내는 나에게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묻는다. 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내가 하던 가게들은 어쩌지?'

'기러기 아빠로 3년을 보내야 하나?'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며 가게를 운영할 수 있을까?'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모두 나를 위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생각했다.


'무엇을 하기 위해 사는 아내에게 바라던 기회가 왔다.'

'배우자로서 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서툰 아빠도 기다려주는 딸인데 난 주말도 함께 보내지 못한다.'

'아빠로서 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난 나에게 40대가 된 지금까지도 답하지 못했던 질문을 다시 했다.


"넌 주말에 뭐 해?"

“일하지...”


"넌 잘하는 건 뭐야?"

“모르겠어...”


"넌 좋아하는 건 뭐야?"

“글쎄... 잘 모르겠어. 그냥 난 아내와 딸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제일 좋아... 그래! 제길. 난 아내를 좋아하고 딸을 좋아한다고!”



그렇게 무엇이 되기 위해 살다가 무엇이 되지 못했던, 먹고살기 위해 살다가 잘하는 것도 하나 없었던, 마흔 하나의 나는......

한 달 만에 모든 가게를 정리하고 가족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떠났다.



그렇게 실크로드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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