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어진 김에 쉬어가자

Chapter 3 - 4

by 비지대디





가을 주말. 아내의 사무소 동료들과 타슈켄트 근교로 나들이를 다녀왔다. 다들 코로나로 인해 못 만나다가, 도시에 규제가 완화되자, 야외에서 얼굴이나 한 번 보자며 성사된 만남이었다. 타슈켄트 외곽에 포도농장을 방문해서 투어를 하고, 혹시나 해서 밥은 먹지 않고 헤어졌다. 그리고 다음 날 오후, 아내는 한통의 메시지를 받고는 사색이 되어 내게 말했다.


“오.. 오빠. 문재씨가 코로나에 걸렸대...”


문재씨는 어제 함께 나들이를 다녀온 직원 중 하나였다. 그가 어제 오후부터 고열에 몸살이 심해 급히 코로나 검사를 했더니, 양성반응 즉 코로나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그 문재씨가 우리 차로 나들이를 다녀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 차 조수석에 문재씨가 앉았고, 아내와 윤슬이는 뒷자리에 탔었다. 나와 아내는 너무 놀라 다리가 풀릴 지경이었다.


“문재씨와 우리 모두 차에서 마스크를 벗지 않았는데.... 그럼 괜찮지 않을까?”

“우린 아직 증상이 없잖아. 우린 괜찮을 거야.”


복잡한 마음을 이끌고, 아내와 나 역시 급히 코로나 검사를 했다. 다음날 오후. 검사 결과가 나올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는 긴장을 하고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었다. "띠링띠링!" 아내의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다행히 아내는 음성이었다.


“거봐~. 내가 뭐랬어. 우린 안 걸렸다니까. 휴~다행이다.”


연이어 나의 결과가 아내의 핸드폰에 도착했다. 아내가 갑자기 눈물을 터뜨리며 말했다.


“오빠... 오빠는 양성이래 어떡해... 어떡해... 흑흑흑.”

“그럴리가... 내가 양성이라고?” 귀를 의심했다.


결과지를 확인하니 양성이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코로나에 걸렸다니... 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온몸에 털이 삐쭉 섰다. 난 즉시 마스크를 착용하고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내가 놀라 어딜가냐며 물었다.


"혹시 모르잖아. 너랑 윤슬이가 걸릴 수도 있고... 일단 호텔로 갈게.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자."


옷가지를 챙겨 눈물이 글썽한 아내를 뒤로하고, 난 근처 호텔로 도망치듯 나왔다.






우즈베키스탄은 코로나에 걸려도 정부에서 일일이 관리하지를 못했다. 증상이 심한 경우 입원 치료를 할 수 있었지만,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코로나가 걸리면 알아서 치료하고 회복해야 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일단 가족들이 걸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홀로 호텔로 피신했다. 한국대사관에서는 호텔로 물과 라면, 밑반찬, 햇반 등의 보급품을 보내주고, 지속적으로 나의 상태도 체크했다. 피신할 날부터 난 증상이 나타날까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증상이 나타나면 어떤 약을 먹을지, 증상이 심하면 어디로 연락할지 등을 미리 상상해 가며, 부디 증상이 안 나타나길 기도했다. 당시 주변에 코로나로 입원하거나 죽는 사람이 많았기에, 혼자 뚜렷한 대책 없이 호텔에서 지내기란 무척 고통스러웠다. 다행스럽게도 하루이틀이 지나도 별다른 증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몸에 큰 이상이 없자 난 코로나 검사 결과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검사가 잘못된 거 아닐까... 아내도 안 걸렸는데 나만 걸린 것도 이상하고 말이야.’


난 PCR 검사보다 더 정확한 검사를 받을 수 있다는 기관을 수소문해서, 3일째 되는 날 다시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 그런데 역시 양성이었다. 이번에는 PCR 검사와 피검사까지 했는데, 둘 다 모두 확실한 양성이 나왔다. 도리가 없었다. 아직까지 증상이 없다는 걸 다행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난 코로나에 걸린 것이었다.


코로나에 걸린 지 일주일이 지났다. 다행히 심각한 증상은 없었다. 약간의 가슴 통증과 무기력증 비슷하게 체력이 떨어진 것 빼곤 대부분 정상이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자 더 심각한 증상이 오진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자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밤마다 호텔 주변 공원을 한 바퀴씩 걸었다. 가슴에 약간의 통증이 있고 답답하여 최대한 호흡을 많이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면서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우즈베크에 온 지 딱 1년이 되었다. 작년 10월에 우즈베크에 들어와 겨우 적응했더니, 5개월 만에 코로나가 덮쳤다. 3월 말에 한국으로 잠시 피신했다가 6월에 우즈베크로 다시 돌아와 윤슬이와 3개월을 집에서 지냈다. 9월에 겨우 유치원을 다시 보냈지만, 감염자 수가 증가하고 잦은 휴교와 온라인수업으로 인해 난 오히려 등원 전보다 더 피로감이 커졌다. 게다가 우리 가족이 코로나에 걸릴까 노심초사하며 살다 보니 더욱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주변에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집 말고 갈 곳도 없었다.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어려움에 상실감이 커져갔고, 그런 나의 상황을 공감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서운함도 생겼다. 그러다가 코로나에 걸렸다. 다행스럽게 증상은 거의 없고, 오히려 집안일과 육아에서 잠시 멀어지게 되었다. 깜깜한 동굴 속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코로나 덕에 휴가를 받은 셈이었다.

게다가 과장해서 '코로나에 걸렸는데 살았다'는 생각이 드니, 지난 고민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오랜만에 몸과 마음이 편안함에 이르렀다.


그렇게 난 20일을 격리하고 완치 판정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오니 아내의 얼굴이 핼쑥하다. 내가 없는 20일 동안 아내는 집에서 재택근무를 하며 윤슬이를 돌봤다. 윤슬이 역시 가족이 코로나에 걸렸기에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독박 육아를 하면서 아내도 많은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리고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도 너무 기뻤나 보다.


“오빠. 안 아파서 정말 다행이야. 고생했어. 근데 나 너무 힘들었어. 내가 윤슬이랑 있어보니까 그동안 오빠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겠네. 오빠는 표현을 너무 안 하니까 몰랐어. 미안해.”


초췌한 얼굴로 용기 있는 고백을 하는 아내의 얼굴이 환하고 예뻤다. 그리고 그 한마디로 내 곁에 머물며 날 괴롭히던 상실감과 서운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우린 그날 저녁 함께 맥주를 마시며 살아 돌아온 안도감과 서로를 이해한 뿌듯함으로 밤늦게 까지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면서 내가 말했다.


“20일 간 정말 고생했어. 이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자.”






그렇게 난 코로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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