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 4
우즈베크에 두 번째 봄이 찾아왔다. 다행스럽게 코로나 감염자 수가 부쩍 줄었고, 사회는 점차 안정되어 갔다. 유치원 역시 휴교나 온라인 대체수업이 줄고, 대부분의 시스템이 정상화되어 갔다. 윤슬이 역시 유치원 생활에 제법 적응된 거 같아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윤슬이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애들이 자꾸 러시아어로 말해. 내가 다가가면 도망가고... 그래서 내가 러시아말을 따라 하면 발음이 웃기다고 비웃어. 난 러시아말 못 하는데..."
윤슬이는 반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자 아시아인이다. 대부분 러시아나 우즈베크 아이들이다. 4-5살 때는 아이들이 어려서 영어든 모국어든 말 자체가 유창하지 못해 큰 상관이 없었는데, 6살이 되니 말이 늘면서 자기들끼리는 자연스럽게 모국어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영어유치원이기에 영어로 말해야 하지만, 자기 나라사람들끼리 자기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일일이 제지할 순 없을 것이다. 다만 혼자만 외국인인 윤슬이에게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윤슬아. 친구들 모두 우즈베크 사람이라 자기들끼리는 영어보다 그게 편해서 그런 거야. 윤슬이도 한국 친구와 한국말로 하는 게 편하잖아. 그러니까 이해해 줘. 대신 아빠도 선생님한테 친구들이 학교에서는 영어를 많이 쓰게 해달라고 말씀드릴게. 알았지?"
윤슬이가 유학생의 고충을 겪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쓰였다.
보통 윤슬이는 3시 30분경 하원을 한다. 그런데 집에만 오면 배가 고프다며 밥을 허겁지겁 먹는다. 아니 아예 하원하면서부터 배가 고프다고 먹을 것을 찾는다. 유치원의 점심메뉴도 괜찮아 보였고, 오후 3시에는 간식도 주는데 늘 배가 고프다 하니 의아했다. 그저 성장기니까 많이 먹는가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윤슬이가 요즘 들어 점심을 너무 안 먹는다는 것이다. 한 1-2주 되어가는데 지켜보다가 걱정이 되어서 연락한다고 했다. 그날 하원을 하면서 윤슬에게 물었다.
아빠 : 오늘 점심은 잘 먹었어?
윤슬 : 응 뭐 대충......
아빠 : 오늘 뭐 나왔어?
윤슬 : 하얀 파스타랑 샐러드랑 당근이랑......
아빠 : 맛이 없었구나? 모두 네가 안 좋아하는 것들이네. 그렇지?
윤슬 : (그제야) 응응! 맞아! 유치원 밥은 너무 맛이 없어. 만두도 냄새가 이상하고, 파스타도 딱딱하고, 하얀 죽도 완전 별로야. 간식으로 주는 쿠키만 맛있다고.
툭 찌르니 우수수 쏟아졌다. 예상대로였다. 서양식 식사가 입맛에 맞을 리 없었다.
아빠 : 그렇지. 아빠도 알아. 아빠도 여기 음식이 아직 맛이 없어. 우리는 한국사람이니까 우즈베크 음식이 안 맞는 건 당연한 거야. 그래도 친구들 따라서 먹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 거야. 친구들은 다들 맛있게 잘 먹어?
윤슬 : 응. 마리암도 잘 먹고. 사마르한은 막 더 달라고 그래. 엄청 잘 먹어. 크크크.
아빠 : 그래. 사실 다 맛있는 음식이야. 우리가 낯설어서 그렇지. 자 윤슬아. 봐봐. 점심을 잘 먹으면 낮잠 시간이야. 낮잠을 잘 자면 맛있는 쿠키가 기다리지. 그리고 쿠키를 다 먹으면...?
윤슬 : 아빠가 오지!
아빠 : 그렇지! 아빠가 온다고! 점심이 맛없었으면 아빠랑 맛있는 저녁밥을 먹고, 점심이 맛있었으면 아빠랑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자. 어때? 그러니까 아빠한테 점심이 어땠는지 자주 말해줘. 알았지?
윤슬 : 오케이! 알았어.
점심 – 낮잠 – 쿠키 – 아빠 – 아이스크림. 참 말도 안 되는 주문이었다.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별다른 방법도 없었다. 앞으로 1년 이상을 더 먹어야 하는 점심을 맛없다고 먹지 마라 할 수도 없었다. 일단 유치원의 메뉴가 싫어진 윤슬이의 감정을 조금 바꿔주고 싶었다. 동시에 나는 요리에 대한 욕구가 더욱 꿈틀대기 시작했다. 저녁 한 끼라도 맛있게 만들어줘야겠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봄방학이 시작되었다. 이번 방학이 유독 반가웠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힘들어하고, 유치원의 식사도 불편해하던 윤슬이가 충전을 하길 바랐다. 난 이번 방학을 기회로 삼아야겠다 마음을 먹고, 윤슬이가 좋아할 만한 메뉴를 몇 개 찜해두고 식재료도 가득 준비해 두었다. 그리고 아빠는 요리사, 윤슬이는 심사위원이라는 설정으로 아침부터 저녁까지 새로운 메뉴를 준비해 심사를 받았다. 그래야 나도 흥이 나서 음식을 만들고 아이도 적극적으로 식사를 할 것 같았다. 팬케익, 프렌치토스트, 시리얼, 군대리아버거 등 아침을 시작으로, 점심엔 계란볶음밥, 멸치국수, 칼국수, 주먹밥, 떡국 등이 나갔고, 저녁엔 미역국이나 어묵국, 소불고기나 떡갈비, 생선구이 등이 메인디시로 준비되었다. 식사 중간중간엔 아이스크림이나 감자튀김 같은 간식도 함께 만들어 먹었다. 그렇게 세프아빠의 손을 거쳐 요리가 나가면, 윤슬이는 마치 마스터 셰프의 심사위원처럼 음식을 한입 먹고 눈을 지그시 감고 폼을 잡아가며 심사를 했다. 엄지 척이 나오면 그 메뉴는 통과, 입 밖으로 내뱉으면 그 메뉴는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식사시간이 많아지니 자연스럽게 대화도 오고 갔다. 밥을 먹으며 유치원생활과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코로나로 선생님들과 거의 만날 수도 없었기에, 유치원생활에 대해 아이가 이야기하지 않으면 부모는 전혀 알 길이 없었다. 특히 최근에 친구들과의 관계가 힘들어졌다고 하니, 난 아이로부터 유치원 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처음엔 친구들에 대해 물어보면 윤슬이는 불편한 듯 회피하며 얼버무렸다. 그러면 난 "응 알았어. 다음에 꼭 얘기해 줘." 하며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그리고 며칠 지나 또 물어보았다. 그러면 윤슬이는 전보다는 조금 더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난번에 내가 물어본 질문에 대해 본인도 생각을 해보는 듯했다. 그렇게 우린 식사할 때마다 조금씩 유치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해나갔다. 그러면서 윤슬이는 자연스럽게 어떤 친구가 좋은지, 누구는 깍쟁이고, 누구는 잘 챙겨주고, 이 선생님은 무섭고, 저 선생님은 잘 웃고 하는 등 유치원 생활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와 아이는 봄방학을 주방에 보냈다. 식사를 준비하고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고, 간식도 만들어 먹고, 숙제도 하고, 게임도 하고 심지어 레슬링도 했다. 잠자는 것만 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주방에서 한 셈이다. 방학이 끝날 무렵, 윤슬이가 방에서 한참을 꼬물거리더니 종이 한 장을 들고 나온다. 그러더니 주방 입구에 종이를 턱 붙이고는 쓱 사라지는 게 아닌가.
"어서 오세요. 여기는 임세운 레스토랑입니다."
그렇게 난 타슈켄트에 내 이름을 건 레스토랑을 오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