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까지는 부모님과 함께였다면 나의 20대는 대학진학과 함께 광주에서 시작했다
고등학생 때까지 알고 지내던 한 마을, 같은 고향 친구들은 하나도 없었다
학교 앞에서 자취하고 학과 동기들과 다섯 명이 한 무리를 이루고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원래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들이 지각이 잦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출석 번호도 빨라 출석 부를 때 들어가지만 막 부르고 난 참이라 지각처리가 잦았다
처음으로 부모를 떠나왔고 대학생이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되는 건 줄 알았다
나름 독립했으니 자칭 나도 어른이라 생각했지만 생각이 어려 자유와 방종을 구분하지 못했다
대학 1학년 여름부터 연애를 시작하였다
대학시절은 연애에 깊이 빠져 살던 시기이다
사람에게서 오는 외로움을 애인에게 기대며 풀고자 했다
이때부터 나는 외로움과 고독을 경험했다
사람이 사람과 함께 있어도 외롭다는 것을 느꼈다
연애하느라 바빠서 교수님이 전해준 정보도 놓치고 점수가 부족하여 교직 이수도 못했다
2학년이 되어 후회해 봤자 이미 버스는 떠난 뒤였다
연애를 해도 인간은 고독한 존재임을 몸소 느끼며 영혼의 방황을 하던 시절이었다
대학 4학년 졸업하자마자 취직하여 인천까지 가게 되었다
취직을 고향과 가장 먼 인천까지 가게 되었으니 더 처절하게 외로웠다
외로움을 느낄 때마다 사람을 찾았는데 언제나 외로웠다
가족의 품만 벗어나도 힘들었는데 애인도 친구도 고향까지 멀어지니 더 힘들었다
그 직장에서 또 새로운 동기들이 있었지만 또 다른 느낌이었다
이미 나의 원가족에서 멀리 벗어난 사회적 관계들이었다
애인은 내가 졸업할 무렵 사업에 실패하여 도망자 신세가 되어있었다
2년 만에 외로움을 안고 다시 대학을 다니던 제2의 고향 광주로 내려왔다
내려와서 취직을 하려니 쉽지 않았다
아는 사람이 취직시켜 준다고 인사비를 달라고 했다
300만 원을 건넸는데 몇 달을 기다려도 말이 없었다
아! 내가 사기를 당했구나 싶어 고소를 했다
피해자인 내가 고소를 했는데 경찰이 얼마나 취조를 무섭게 하든지 경찰 앞에서 펑펑 울었다
다시는 이런 고소사건과는 멀리하고 살아야지 맘먹은 계기가 되었다
애인 집에 잠시 거처를 정하고 살던 시절이었는데 애인은 도망자 신세라 내게 관심을 가져주지 못했다
외로워서 내려왔는데 따뜻한 보금자리는 없었다
이때 애인과 헤어지고 시골 고향으로 낙향을 하였다
시골병원에서의 기숙사 생활도 쉽지 않았다
새로운 사람과 한방을 써야 했고 내가 잘했던 수술실 업무가 아닌 병동업무였다
이때 주사를 얼마나 많이 놓고 다녔던지 주사에 찔리고 하면서 주사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간호사가 주사를 보면 무서워하다니 사실이다
지금도 주사를 잘 안 맞는다
나는 말을 많이 안 해도 되는 수술실업무가 잘 맞았고 말을 잘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 간의 대화에 능숙하지 못했다
나는 내가 유난히 외로움을 잘 타는 성향이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문제점을 내가 아닌 밖에서 찾으려고 애썼다
부족한 부분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서 보충하려고 애썼다
어느 누구도 나의 외로운 부분을 메꿔줄 이는 없었다
나는 쉽게 적응하고 쉽게 마음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 보호막을 너무나 두껍게 두르고 살았던 것이다
내 고집이 세서 쉽게 다가가지 못한 사람이었다
결국은 나 스스로 나를 보호하기 위해 철갑을 두르고 살았다
애인이 다시 찾아오고 결혼을 준비하면서 제2의 고향 광주로 올라와 수술실에 다시 취직하였다
이때는 애인도 있고 내가 잘하는 수술실에 취직하게 되어 잠시 외로움을 잊고 지낸 시절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결혼하고 큰애를 낳으러 병원에 가는 날 남편의 서울살이가 시작되었다
나는 남편과 평생을 떨어져서 살아야 하는 팔자인가 보다
큰애를 출산하고 6개월 만에 다시 취직을 위해 고군분투하다 건강검진센터에 입사하게 되었다
남편이 젊은 시절 시작한 사업이 크게 넘어져 도피와 재기를 위해 서울로 올라간 후였다
그러나 수술실이 편하고 최적화된 사람이 외래에서 환자들을 대하는 말주변이나 응대가 쉽지 않았다
결국은 6개월 만에 쫓겨나다시피 하여 그만두게 되었다
너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이때 크게 깨달았다
내가 나를 잠그고 살다 보면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없겠구나
내가 먼저 다가가고 나를 표현해야 되겠다는 것을 깨닫는 시기였다
어렵게 취직을 시도하여 입사한 곳이 지금 근무하는 분만병원이다
남편의 부재로 시어머니가 밤근무할 때는 큰애를 봐주었지만 언제나 잠이 부족했다
시어머니와 일 년을 함께 살면서 느낀 점은 좋게 살든 싸우며 살든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며느리들은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지금도 변함없다
20대 중반에 결혼하여 20대 후반에 둘째까지 낳고 정신없이 육아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둘째까지 낳고 보니 밤근무하는 것이 너무 힘에 부쳐 병원장에게 말했다
"아이들 문제 때문에 더 이상 근무 못하겠습니다"
병원장이 일주일에 한 번 했던 밤근무를 빼주어 29살 때부터 지금까지 낮근무하는 상근직을 유지해오고 있다
어린아이 둘을 육아하는 것에 치여 남편의 부재를 크게 생각하지 못한 시기이다
아니다
남편이 잠깐 서울에 가 있는 거라 생각하던 시절이다
언제나 남편을 그리워하며 언젠가는 하는 기대 속에서, 희망고문을 하며 살았다
생존을 위해, 살기 위해 일하고 일했지만 외로움을 느낄 새는 않았지만 인간의 고독은 여전했다
나의 20대는 외로움의 연속이었다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왔지만 대학시절은 그래도 애인이 있어서 덜 외로웠다
취직을 위해 인천까지 올라갔을 때가 가장 힘들고 외로운 시기로 향수병에 걸려 낙향하였다
다시 제2의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애인의 사업실패로 쫓기는 자는 여유가 없었다
나에게 관심을 제대로 쏟지 못하여 함께 있어도 외로움을 느꼈다
결혼 후 첫애출산과 함께 사울로 상경한 남편과 20대에는 일 년에 서너 번 보는 사이가 되었다
사업실패로 쫓기는 자와 그 가족은 언제나 조마조마한 상태에서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