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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Oct 05. 2024

오래된 영화

S#1. 실내. 밤. 집 안.

남자의 8평 남짓한 집 안. 불은 꺼져 있다.

오른쪽 구석에는 두 명이 누워 잘 수 있는 침대가 놓여있다. 그 위에 이불은 마구 구겨져 돌돌 말려 있고, 베개는 아무렇게나 던져져 반쯤 접혀 있다.

왼쪽 벽에는 컴퓨터가 있다. 웅- 하는 소리가 난다. 모니터에서 빛이 나오고 있다.

모니터 앞 의자에 남자가 앉아있다. 남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모니터에서 나온 빛이 남자의 몸을 통과하지 못하고 옆으로 퍼진다. 남자의 실루엣 선을 따라 빛이 번진다.

남자는 양손으로 얼굴을 막고 있다.

남자의 등이 떨린다.

모니터 화면에 영상 편집 프로그램 화면이 떠있다.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는 분홍색과 초록색 바가 복잡하게 정렬되어 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영상이 멈춰 있다.

영상에는 푸른 목도리를 맨 여자가 있다.

남자의 억눌린 울음소리가 들린다.

남자의 얼굴과 등 사이 공간으로 모니터를 향해 천천히 클로즈업.


S#2. 실내. 밤. 청계천 옆 산책로.

푸른 목도리를 맨 여자가 서있다. 볼이 붉다.

붐마이크가 여자의 머리 위로 내려온다.

여자: 감독님, 목도리 어디까지 나오나요?

푸른 목도리를 맨 여자의 반대편에 사람들이 몰려있다.

삼각대 위에 카메라가 세워져 있다. 렌즈는 여자를 향하고 있다. 허리를 숙여 카메라 화면 얼굴을 대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든다.

남자가 여자에게 다가간다. 검지손가락을 들어 푸른 목도리가 한 번 말린 곳에 갖다 댄다.

남자: 딱 여기까지요.

뒤를 돌아 사람들을 바라본다.

남자: 들어갑시다.

다시 몸을 돌려 여자를 지나쳐 걸어간다.

여자의 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여자 A가 있다. A는 코가 붉어진 채로 흰 입김을 뱉고 있다.

A는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A는 카메라를 등지고 서있다. 남자가 A 앞에 한쪽 무릎을 꿇는다.

스태프 1: 카메라 롤.

스태프 2: 스피드.

스태프 3: 7에 1에 1.

스태프 3이 슬레이트를 친다. 날카로운 소리가 퍼진다.

남자가 고개를 숙인다.

남자: 액션!

남자가 A의 신발끈을 묶어준다. 푸른 목도리를 한 여자가 그 옆을 지나간다. 여자가 그들의 옆을 완전히 지나칠 때까지 남자는 A의 신발끈을 묶어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손을 움직인다.

남자가 고개를 든다. A와 눈이 마주친다. A가 눈을 접으며 소리 없이 웃는다.

남자의 시야에 카메라가 걸린다. 남자가 다시 고개를 내린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S#3. 실내. 밤. 집 안.

남자가 고개를 든다.

눈은 붉고, 볼은 젖어 있다.

모니터에서 나오는 불빛이 물기에 반사되어 볼이 반짝인다. 가로등 불빛이 강물에 반사되어 그것이 반짝이는 것처럼.

남자는 모니터의 오른쪽 상단을 바라본다.

영상 속 푸른 목도리를 맨 여자 뒤로 A와 남자의 모습이 작게 보인다. 남자는 A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다. A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책상 위에 올려진 남자의 오른쪽 손이 움찔거린다.

웅- 하고 냉장고 소리가 난다.

남자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다.


끝.


+) 이별할 줄 몰랐던 오만

 내 시나리오에 당신이 감독을 했을 때, 엑스트라로 커플이 필요했었다. 겨울, 새벽, 청계천 옆. 스태프는 우릴 포함해서 7명, 배우는 한 명. 나는 시나리오 작가였으니 손이 남았고, 당신은 감독이지만 내 연인이었으니 우리가 그 엑스트라가 되었다. 당신은 지문에 충실했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풀린 신발 끈을 묶어주었다. 우리는 카메라 속에 작게 담겼다. 나는 행복의 숨을 목도리 속에 숨겨 내뱉었다. 신발 위에 올라간 당신의 손은 붉은빛을 띠고,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를 보며 웃을 수 있었다.

 그래서 묻고 싶은 건 당신이 그 씬을 편집할 때 울었냐는 것이다. 벌써 벚꽃이 핀다. 이제 곧 영화가 완성된다고 들었다. 당신이 내 신발 끈을 묶어주는 장면을 몇 번이나 보았냐고 묻고 싶다. 당신은 그 모든 순간에 모니터에 머리를 박았는지, 손을 떨었는지, 담배를 피워야 했는지도 묻고 싶다. 초점이 맞춰진 배우보다 흐릿한 우리 둘에 시선을 두어 편집한 건 아닌지, 그래 그런 걸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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