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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Oct 19. 2023

바다 위의 소나기

노을 - 라흐마니노프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18번

한동안 쾌청한 날씨였는데, 아침 일찍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출근길에 내리는 비가 무심하기만 하다. 이제 막 물들길 시작한 단풍들이 다 떨어지는 게 아닐까 걱정도 된다. 이번 비가 내리면 날씨가 추워지겠지. 슬슬 겨울옷들을 옷장에서 꺼내두어야 겠다. 


비를 그리기는 쉽지 않다. 물에 홀딱 젖은 모습이라던가, 폭풍우를 피해 이리저리 몸을 피하는 이들의 모습은 자주 등장하지만, 비 자체에 화가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건 아마도 인상주의 화가들부터가 아닐까 싶다. 시간의 변화에 따른 미세한 공기와 빛을 그리려던 부단히 노력하던 그들에게 비는 꽤나 특별한 소재였음이 틀림없다. 비가 왔을 때의 공기의 축축함, 먹구름의 움직임, 그리고 깨끗해진 공기 사이로 더욱 밝게 빛나는 햇살까지...그리기는 꽤나 까다로웠을 것 같지만 - 그리고 비를 맞으면서 그리는 것도 힘들었겠지만- 어쨌든 이제껏 남이 그리지 않는 것을 그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비는 일종의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는 소재가 아니었을까? 


영국의 인상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보면 참으로 부지런한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새벽이나 밤이나 기차역과 항구, 바닷가 그리고 산 정상을 올라가서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자동차도 없던 시절에 캔버스와 화구통을 들고 이리저리 찰나에 변하는 빛과 공기를 담고자 이리저리 돌아다녔을 그를 생각하면 굉장한 집념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하는 추측을 한다.


비가 그치고 먹구름이 물러나며 찬란한 햇살이 드러내는 순간은 놀랄만큼 황홀하다. 특히 일몰 시간에는 더욱 아름다운데 아무래도 찰나의 시간에 붉게 물들었다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노을은 어떤 화가가 와도 그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캔버스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공기 중의 수분에 빛이 산란되어 마치 파란 화선지 위에 뿌려진 붉고, 노란 물감이 이리저리 번지듯 비가 온 뒤의 노을은 평소보다 더욱 아름답다. 연도는 미상이지만 컬러나 터치로 보아 윌리엄 터너가 1820년대 쯤 영국 어딘가의 해변을 그렸을 법한 그림을 보면 화가 역시 소나기가 지나간 뒤에 노을이 비친 순간에 매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처럼 똑같이 그릴 수 없다면야 자신의 방식으로 그리면 된다. 바닷가에 앉아 하염없이 비가 지나가길 기다리다가 자신의 원하는 순간이 오자 갑자기 매의 눈을 하고 찰나를 포착하여 슥슥 자신이 느끼는 대로 거침없이 붓을 놀리는 터너의 모습이 상상된다.


넘실거리는 검푸른 바다 위에 검은 먹구름이 지나가며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노란 태양이 만들어 내는 붉은 노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전에 소개했던 존 컨스터블의 그림과 구도는 거의 비슷하지만 붓질과 컬러 면에서 전혀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터너의 그림은 한창 비가 내리는 와중인 컨스터블의 그림과는 달리 더욱 자연의 아름다움에 집중했다. 붉고 노란 컬러가 어두운 파랑과 검정에 대비를 이루어 소나기가 지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희망과 밝음, 아무런 탈없이 비가 지나간 뒤의 안도감마저 느껴져, 감사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붉게 물드는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할 수 있다. 


만약 내가 터너의 조수였다면 그리기를 다 마친 그에게 진한 향이 나는 데운 와인을 대접했을 것 같다. 서둘러 화구통을 챙겨 자리를 떠나기 보다는 아직 남아있는 노을과 그의 그림을 감상하며 그가 원하던 장면을 성공적으로 그려낸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대가에게 어떤 음악을 들려준다. 바로 라흐마니노프가 편곡한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중 18번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만들어낸  화려한 기교를 자랑하던 멜로디는 러시아의 대가의 손길을 거쳐 스케일이 더욱 커지고 깊어졌다. 여전히 화려한 황금빛을 내뿜지만 찬란함보다는 원숙함이다.  다사다난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노을에 더욱 잘 어울리는 황금빛이랄까 . 피아노와 관현악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섬세한 선율은 파도처럼 우리의 마음 속에 밀려왔다가 스르르 사라진다. 노을의 마지막처럼, 파도의 하얀 거품처럼 깊은 여운을 남기면서...


자칫 짜증날 수 있는 비오는 아침이지만, 좋은 그림과 음악을 들으며 릴렉스한다. 조급함은 사라지고, 여유가 그 자리를 채운다. 오늘은 무슨 일을 해야하나 생각하며 한결 차분한 마음으로 리스트를 만든다. 어쩌면 먹구름이 오랫동안 머물러서 오늘 저녁엔 노을을 보지 못 할 수 있어 아쉽긴 하지만, 내일은 더욱 화창하고 맑은 날씨가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그 때까지 단풍들아 버텨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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