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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Oct 21. 2023

딸과 함께 한 자화상

양자식지친력(養子息知親力) - 드보르작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노래"


양자식지친력(養子息知親力), 자식을 직접 길러봐야 부모님의 사랑을 알수있다는 한자성어다. 부모님의 속을 썩일 때마다 "너랑 똑같은 자식을 낳아봐야 내마음을 안다"라는 말을 종종 듣는다.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건 보답없는 열정, 시간 그리고 돈을 끝없는 인내를 가지고 쏟아붓는 일이기에 부모님 입장에서는 마음을 몰라주고 속을 썩이는 자식이 얼마나 야속할까?


여기 한 여류화가가 있다. 여성들의 사회생활이 제약이 아직 심하던 때, 뛰어난 재능과 미모, 그리고 다정한 성격으로 사회의 유리벽을 깨고 본인의 이름을 걸고 활발한 활동을 하고, 미술사에도 큰 족적을 남긴 여인이다. 다만 아무리 신분이 높은 여성이라도 남편이 없다면 제대로 권리를 주장하지 못 할 수가 있으니, 그녀 역시 좋던 싫던 남편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녀의 이름은 바로 엘리자베트 비제 르 브룅, 가장 화려한 궁중문화를 꽃피었던 프랑스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뚜와네트의 마음을 사로잡은 한 화가로 왕비의 초상만 30점 이상 그렸다. 어린 나이에 타지로 시집와 궁중암투를 견뎌야 했던 왕비와 뛰어난 재능을 가진 여류화가로 세간의 질시와 편견을 견뎌야 했던 둘은 아마도 단순한 고객과 화가의 사이를 뛰어넘어 서로의 심정을 이해해 주는 동지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런지 그녀는 다양한 왕비의 모습을 그렸다. 한나라의 국모로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위엄이 있는 모습을 그렸는가 하면, 세아이의 어머니로서 자애로운 모습도 그렸다. 또한 당시로서는 허락이 되지 않았던 목가적인 복장에 새색시처럼 수줍게 미소짓는 여인의 모습으로도 그렸다. 왕비의 총애를 받는 안락한 생활도 끝내 대혁명이 시작되자 막을 내리고 그녀는 다른 귀족들처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망명을 떠난다. 왕비의 화가로서 이미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간 이상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남편없이 어린 딸을 데리고 떠난 그녀에게 망명생활은 쉽지 않았다. 고국에 남은 미술상이던 남편은 그녀의 그림을 팔아 소액만 보내주고 음주와 도박으로 재산을 탕진했다. 어린 딸의 교육까지 책임져야 하는 그녀는 생존을 위한 생활전선에 몰렸다. 다행히 당시 유행의 첨단을 달렸던 프랑스 왕실에서 온 그녀는 망명지의 왕족과 귀족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까다로운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며 그림을 그리고 자식을 키우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딸이 그녀의 뜻을 거역하고, 새로운 망명지인 러시아에서 만난 평범한 청년과 결혼했을때 그녀는 세상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어린 딸은 그녀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다. 그러나 어느덧 둥지를 떠날 나이가 되자 어린 딸 줄리는 미련없이 엄마를 버리고 연인을 택했다. 그런 선택을 한 줄리에게는 줄리 나름대로의 속사정이 있었겠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특히 서로 의지하며 외로운 타지생활을 버텨온 엄마인 엘리자베트에게는 배신감이 더 컸으리라.


엄마의 목에 팔을 두르고 환히 웃던 딸의 미소를 보고 있으면 엘리자베트의 힘듦은 아마 눈녹듯이 사라졌을 것이다. 고국에서 돈을 독촉하는 남편의 편지도, 그림에 대해 잘 모르면서 이리저리 불평을 하는 콧대높은 왕족이나 귀족들의 갑질도 딸을 위해서라면 참을 수 있었겠지.        


As for myself, all the charm of my life seemed to have disappeared forever. I could not find the same pleasure in loving my daughter, and yet God knows how much I still love her, despite her faults. Only mothers will understand me when I say this.


나에게는 내 인생의 모든 기쁨이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보였습니다. 딸을 사랑하는 것에서 같은 기쁨을 찾을 수 없었지만, 그녀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는 하나님이 아실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는 오직 어머니들만이 나를 이해할 것입니다.


— 비제 르 브룅의 회고록 중에서


결국 딸을 남겨두고 고국으로 돌아간 그녀는 남편과 이혼을 하고, 홀로 꿋꿋히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명성을 이어나간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어찌 알 수 있을까? 깊고도 넓은 부모의 심정은 그 입장이 되보지 못 한다면 알 수 없다. 애석하게도 줄리는 엄마의 반대를 무릎쓰고 한 결혼이 파탄이 난 후 얼마뒤 병사한다. 딸을 외면하던 엘리자베트는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그녀와 화해하지만, 딸은 세상을 떠난다.  "부모가  죽으면 자식은 땅에 묻지만,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있다. 아마도 엘리자베트는 평생 기억 속의 어린 딸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것이다.


서로를 의지하며 다정했던 모녀의 한때를 지켜보고 있으니 체코의 작곡가 드보르작의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노래"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노래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늙으신 어머니께서 아직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실 때,

그녀의 뺨에서 눈물이 계속 흘렀네.

이제 내가 나의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려는데,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흐르네

그을린 갈색 뺨에서 눈물이 흐르네   


체코의 시인 아돌프 헤이둑의 시집인 "집시의 노래"에서 발췌한 7개의 시에 드보르작이 곡을 붙였는데, 이 "어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노래"는 그 중 네번째 곡이다. 가사를 모르는 이도 애절한 멜로디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제목만 듣고는 "부모님의 사랑"을 그리는 노래인가 하겠지만, 그렇지는 않다. 드보로작이 이 곡을 작곡했을 당시 그는 연달아 세 아이를 잃었다. 자식을 잃고 난 절절한 부성애를 드러내는 동시에 자신을 키운 부모님의 심정을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노래다. 양자식지친력(養子息知親力)에 딱 어울리는 노래가 아닐까?


아직 자식을 키워보지는 않았지만, 나를 키운 부모님께서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잘 알고 있다. 가끔 나는 내자식에게 우리 부모님께서 해주신 만큼은 절대로 못 할 거란 생각을 한다. 누가 부모님만큼 나에게 댓가없는 물질적, 시간적 투자를 할 수 있겠는가? 단지 자식이라는 이유로 큰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부모님에게 고집따위는 부리지 않는게 조금이라도 은혜를 갚아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게 조금이나마 효도를 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미성숙한 인간이라 내 주장이 먼저일때가 많다. 새벽에 일어나 드보르작의 음악을 들으며 세상 다정했던 모녀의 그림을 보니 여러 생각이 든다. 천하의 몹쓸 딸 같으니라고...부끄러워 직접 말씀드리지는 못 하지만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을 이렇게 글로 짧게나마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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