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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ecilia Choi Aug 20. 2023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

그는 과연 용서받았을까? - 브루흐 "콜 니드라이"

이 세상의 모든 죄는 용서받을 수 있을까? 죄의 용서는 누가 하는 것일까? 모든 종교에서 "속죄"와 "용서"는 중요한 화두이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마태오복음 6장 14~15절


용서는 누구를 위해 하는 것일까?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가해자는 영원히 불행할까?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아들을 죽인 후 신에게 회개함으로써 "셀프용서"를 한 후 "마음의 평화"를 찾은 가해자를 보고 기함한다. 결국 내가 용서를 하든 하지 않았던 가해자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일까?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진정 용서받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세상엔 뻔뻔한 사람들도 많다.  


천주교에서는 고해성사를 하고, 기독교에서는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죄를 깨닫는 참회의식을 통해 죄를 없앨 수 있다고 믿는다. 죽으면 가는 어딘가에서 고통받지 않기 위해 속죄는 중요하다. 누구나 살면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누구에게 용서를 받아야 하는 것일까? 온전한 용서는 누구의 몫일까?


신에 의하여 모든 죄를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다른 종교와 달리 유태교의 속죄 의식은 나름 합리적이다. 욤키푸르라는 대속죄일이 오기 전에 사람에게 지은 죄는 직접 그들을 방문하여 사죄하여야 한다. 죄를 용서받고 싶은 자는 남의 죄도 용서해야 한다. 이렇게 사람에게 지은 모든 죄를 정리하고 나면 7월 10일 욤키푸르에 신에 대한 죄를 고하고 용서받는다. 마치 함무라비의 대법전처럼 듣고 있으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며 납득이 간다.


이 욤키푸르의 전야제 때 불리는 노래를 독일의 작곡가 막스 부르흐가 재창조한 곡이 "콜 니드라이"이다. 정식 명칭은 "‘히브리 주제에 의한 첼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아다지오"인데, 주로 오케스트라와 첼로 버전으로 주로 연주된다. 바이올린 버전도 있지만, 역시 곡의 분위기 상 첼로의 저음을 따라갈 수 없다.


신에게 자신의 모든 죄를 고백하듯, 심각하고 우울한 멜로디로 시작하다가 후반부에 가면 샤콘느처럼 장조로 바뀌며 뭔가 희망찬 멜로디를 들려준다. 마치 신의 관대함과 용서를 약속하는 듯 곡의 분위기가 밝아진다. 처음에 도입부의 곡의 음울함을 듣고 있으면, 세상의 모든 죄를 내가 지은 지은 듯한 느낌이 든다. 신 앞에 홀로 남아 나의 죄의 심각함을 낱낱이 고백하는 느낌이랄까. 어쩌면 용서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느낌이다.


이 세상의 가장 큰 대죄는 무엇일까? 무지, 나태, 탐욕 등 형이상학적인 대답을 꼽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강간, 도둑질, 살인등 현실적이 죄를 꼽는 사람들이 있다. 요즘에는 마약이 추가되었다.


모든 죄들은 면밀히 살펴본 결과 아마 친족살해야말로 대죄가 아닐까 싶다. 고대에서는 친족을 살해하는 죄를 가장 크다고 해서, 일반 살해보다 더 무겁게 처벌되곤 하였다. 그리스신화에서 신들은 용서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사랑하는 아내나 자식을 제 손으로 죽이는 저주를 내린다. 이는 죽임을 당하는 자나, 죽이는 자나 너무 고통스러운 벌이다. 죽임을 당하는 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살아남은 죽인 자 역시 대부분 미쳐 날뛰다 제 손으로 목숨을 끊는다.


이러한 존속살해를 저지른 이는 실제 서양과 우리 역사에서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화가인 일리야 레핀의 " 이반 뇌제와 그의 아들 이반"은 실제 일어난 광기 서린 희대의 비극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인 이반은 러시아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한국에서는 이반 뇌제로 잘 알려져 는데, "번개황제"라는 별칭처럼 추상같은 권력으로 러시아를 이끌었지만, 그의 성격 역시 "벼락"같았다.  그는 아동학대가 인성발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단적으로 잘 보여주는 케이스인데, 어린 시절 이어받은 물려받은 권력으로 인해 바야르라는 권문귀족들에게 육체적, 정신적 학대를 받아 괴팍하고 포악한, 요즘말로 하면 분노조절장애였고, 거기다 광증을 불러일으키는 매독환자였다.


그나마 사랑하는 아내를 맞아 잘 사는가 싶었는데, 아내가 죽자 그 충격 때문인지 서슴없이 귀족과 성직자들을 죽이며 다시 폭군이 되었다.  그의 광적인 분노는 곧 사랑하던 아내 아나스타샤 사이에서 낳은 후계자 아들에게 향한다. 이 얼마나 비극인가. 이쯤이면 신들이 정말 그를 미워한 게 아닌 거 싶다.


역사를 살펴보면 폭군들 중엔 자신의 가족에겐 세상 다정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반 뇌제는 그런 경우가 아니었다. 세 번째 황태자비 (이전의 두 명의 황태자비는 수도원으로 보내버렸다.)를 꾸짖는(?) 과정에서 그녀가 그만 유산하자, 이에 격노한 황태자가 아버지를 찾아가 항의를 한다. 좀 참았으면 좋았으련만 불같은 성정의 아버지에 불같은 성정의 아들이었는지 격한 설전을 벌이며 서로를 저주하다 결국 아버지가 아들을 때려죽이고 만다. "정신상태"가 아픈 아버지라 고의인지, 병증에 의한 실수인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어떤 아버지가 자식을 죽이고 멀쩡할 수 있을까?


레핀의 그림은 "고의"가 아닌 "광증"을 앓는 황제의 "과실치사"에 더 무게를 둔다.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앞에 있는 피를 흘리는 아들을 애절하게 껴앉고 황망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황제의 모습을 보라. 미친 황제보다는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아버지의 상실감과 비통함이 느껴진다.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죄는 없다고 했다.


아들을 죽인 이반 뇌제는 과연 용서받을 수 있었을까? 남을 용서함으로써 아들을 죽인 죄를 용서받을 수 있을까? 남이 용서하더라도 그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었을까? 신은 그를 용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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