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 때 구입한 서랍장이 있었다. 가구 잘 만들기로 유명하다는 브랜드의 서랍장이었고 디자인도 색깔도 유행을 타지 않는 단아하고 잔잔한 느낌이 좋아 몇 년 동안 잘 사용하고 있었기에 가구를 비우면서도 서랍장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서랍을 여닫을 때마다 거슬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고 일단 못 들은 척 여닫기를 계속했더니 어느 순간 힘을 주어도 문이 잘 열리지 않더니 곧이어 열린 서랍문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지를 못했다.
서랍장을 정리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이미 몇 번 큰 가구도 정리를 해본 터라 후딱 일을 처리하고자 하는 급한 마음이 앞서기 시작했고 주말 아침부터 서두르기 시작했다.
일단 아이들이 깨기 전에 일을 마무리하자 싶어서 외출준비에 바쁜 남편에게 서랍장을 옮겨달라고 재촉했다.
서랍장 안에 짐들을 다 비우고 혹시나 쓸 사람이 있을까 해서 마른걸레로 안과 밖을 훔친 후에 늘 하던 대로 서랍장을 현관 쪽으로 밀기 시작했다.
어라. 짐을 다 제해서 한결 가벼워졌을 서랍장이 전혀 반응하질 않는다. 숨을 참고 나름의 기합까지 넣은 후 다시 한번 더 힘을 모아 밀어보니 조금 움직이긴 했지만 내 힘으로 이동시킬 무게가 아니었다.
브랜드 가구는 나름 남달랐다. 원목으로 만든 각 판은 두꺼운 나사들을 다 연결되어 있고 각 서랍칸마다 철제레일이 장착된 서랍장은 합판목재로 만든 책장도 밀고 끌어 내보내고 소파도 여기저기로 옮겨본 내 입장에서 너무나 무거웠다.
하지만 시작한 이상 서랍장을 현관통로에 둘 수는 없는 노릇. 현관 앞까지 온 힘을 다해 옮겨두고 나니 남편이 급하게 문을 나서며 현관 앞에 놔두면 나중에 관리실에서 카트라도 빌려 실어서 천천히 옮겨놓겠다고 말하고 나가버렸다. 남편의 눈에도 손으로 밀어 옮길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던 것이다.
추진력이 강해서 실행이 빠른 사람에게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특히 나에게는. 그 약점이 바로 급한 성격이다. 한번 마음먹었으면 바로 실행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게 어떤 이유에서건 제지를 당하면 잘 기다리지를 못하고 어떻게든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일을 해야 한다.
그리하여 토요일 오전. 아직 조용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서랍장과 나의 사투가 벌어졌다,
일단 밀어서 부드러운 표면으로 되어있는 공동현관의 내리막길은 내리막이라는 장점도 십분 활용하여 어떻게든 내려왔다.
그다음 쓰레기장까지는 울퉁불퉁한 시멘트 타일이 이어지는데 도저히 그냥 밀기만 해서는 서랍장을 옮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고 실제로 아래 부분에 다리까지 달린 서랍장이어서 원목 다리마다 울퉁불퉁한 부분과 맞물리면서 기우뚱 쓰러질 뻔하기도 하며 앞으로 나가지를 못했다.
밀었다가 끌었다가 땀을 흘리며 아주 조금씩 천천히 쓰레기장으로 서랍장을 옮겼다. 소리는 왜 이렇게 큰지.
중간쯤 왔을까. 힘을 줘서 서랍장을 끄는데 허리를 삐끗하고 말았다. 나중에 배운 것이지만 무거운 물건 등을 들 때 대부분 허리에 힘을 주지만 그렇게 하면 허리를 다치기 쉽고 실제는 배에 복식호흡하듯 힘을 강하게 줘야 더 안전하다고 한다. 얼른 서랍장을 옮길 생각으로만 급했던 내가 허리와 배를 구분할 틈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저 끙끙 팔과 허리에 잔뜩 힘을 모은채 끌다 보니 긴장하고 있던 허리에 결국 큰 무리가 간 것이다.
그러나 그 아픈 와중에도 다섯 걸음 정도면 이제 고지에 도달할 수 있겠다는 시각적 목표지점이 너무나 분명해서 돌아설 수가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통로에 서랍장만 덩그러니 놔두고 남편이 돌아올 저녁까지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경비실에 연락해서 도움을 청해볼까? 지나가는 분이 계시면 같이 밀어달라고 해볼까? 이렇게나 무거워서 힘든데 도와달라고 했다가 나중에 오히려 원망을 듣지 싶었다.
사람이 긴장하면서 일을 할 때는 그 정신력이 순간적으로나마 육체적 아픔도 덮어버린다.
아파트 단지를 울리는 가구 끌리는 소리,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에 둘 수 없다는 명확한 현실 인식, 그리고 이제 다섯 걸음 정도면 이 사투를 끝낼 수 있다는 목표확인.
그래서 아픈 허리를 뒤로 미룬 채 끝끝내 서랍장을 다시 밀고 밀다 안되면 끌면서 쓰레기장까지 도달했다.
목표를 달성했다.
그리고 삐끗한 허리로 몇 주간 고생을 이어갔다.
그 경험을 통해 그제야 "미니멀 라이프"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를 힘들게 하면서, 다치기까지 하면서 여기에 몰입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왜 나는 이렇게 조급하고 마음이 바쁜가.
어차피 아픈 허리로 당분간 짐정리는 멈춰야 했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잠시 쉬어가며 곰곰이 미니멀라이프가 나에게 지금까지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계속 이어갈 가치가 있는 것인지 생각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