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트라우마에게

악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by 여니


어느덧 무더위는 지나고 선선한 공기의 가을냄새가 조금씩 풍겨오는 초가을입니다. 그 덕에 지쳐있던 몸과 마음이 몽글몽글해져 가는 것 같습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저는 잘 지냈답니다. 진정 사랑하는 이를 만나 한 가정을 꾸려 반려견, 반려묘들과 함께 오순도순 지내고 있답니다.


그대들이 준 상처들과 기억들 때문에 하루하루가 고되고 지쳐 이 악몽의 끝자락은 없을 거라 방황했습니다. 어떨 때에는 내 팔자를 탓하기도 하고 어떨 때에는 분노가 육신을 지배해 폭력적인 성향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대들의 그림자를 밟으며 원망하고 원망했습니다. 항상 불안 속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삶을 보질 못하고 과거에 붙잡혀 모든 것이 싫어 생을 마감하고자 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내 옆을 지켜주는 사랑하는 이덕에 큰 용기를 얻어 삶을 바꿔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간 입에 달고 살았던 약들을 단숨에 끊어내고 항상 가까이하던 술을 멀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쉬웠던 일은 없었습니다. 잠을 자지를 못해 일상생활이 되질 않아 극도로 예민해져 하루에도 감정이 수십 번씩 바뀌기도 했습니다. 하나 그것들은 마음이 주는 안식보다 한참 밑이었나 봅니다.


불안하게만 하던 생각들은 남편이 곁에 있어 하나둘 떨쳐져 나가게 되고, 나를 항상 응원해 주는 가족이 있어 하루를 살아도 최선을 다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노동에 지친 몸은 이부자리가 주는 포근함에 녹아 달콤한 수면에 취하는 밤이 잦습니다. 여태 무기력한 삶을 살아온 나날들을 반성하며 나태했던 습관들은 고치려 노력하고 주어진 일 또한 최선을 다하게 되어 일의 능률이 올라 인정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는 항상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노력했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우울감이 동반하는 것이 싫어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 집착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예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는 성급한 자만감에 빠져 그에 따른 강박을 만들어 냈습니다.


잘못됨을 인지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현명하게 살아가는 법에 한걸음 더 다가간 계기라 생각합니다. 단단하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여태 넘어지고 무너졌을 때 일어서는 법을 몰라 누군가의 도움만을 바라며 네발로 기어 다니던 삶은 이젠 뒤로하고 두 발로 일어서 당당히 앞을 향해 걸어 나가고 싶습니다. 그곳이 비포장도로인지 가시밭길인지 아무도 모르겠지요.


조급하게 뛰어가지 않으렵니다. 달려가다 넘어지면 상처와 아픔은 배가되어 회복하기까지의 시간이 걸릴 테니까요. 인생이란 마라톤을 즐기며 살아볼까 합니다. 내 페이스에 맞춰 노련하게 완주하려 합니다. 그대들의 그림자가 한 번씩 나를 찾아와 괴롭히는 날이 있어도 금방 떨쳐내 버릴 겁니다. 의미를 부여하지도 슬퍼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때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나 자신을 더 보살피고 응원해 줄 테니까요.


당신들의 인생에 개입해 영화 같은 복수를 하려던 헛된 희망은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그저 당신들이 남들에게 줬던 상처크기만큼 고달프게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대들이 아직도 자신을 원망하냐고 물으신다면, 솔직한 심정으로는 "네. 아직도 당신들을 원망하고 증오스럽습니다." 조금 더 솔직한 심정은 "내가 눈감는 날까지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에게 왜 이런 아픈 기억들을 줘서 미칠듯한 분노감을 들게 하는지 되려 묻고 싶습니다. 그저 자신보다 약해 보여서였나요? 가지고 놀기 딱 쉬워 보여서 그랬나요? 돌아오지 않는 대답이란 걸 알면서도 매번 같은 질문을 습관처럼 합니다.


때론 당신들이 준 상처와 시련들 덕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라 생각합니다. 주변에 걸러야 할 사람이 어떠한 사람들인지 구분 짓게 되었으니까요. 더는 멍청하게 살지 않을 겁니다. 누군가의 말에 휘둘리지도 현혹되지도 않을 거니까요. 공과사를 구분하듯 삶의 이치를 구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대들을 떠올리면 억울하고 화가 나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내 삶이 무너지진 않을 겁니다. 삶의 원동력은 당신들이 아니니까요.


잘 지내란 말은 거추장스러우니 하지 않을게요. 내가 행복에 겨워 입가에 미소가 끊이지 않을 때 나에게 트라우마를 선사해 준 당신들 눈가에는 피눈물만 흐르는 게 되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럼 편지 마무리하겠습니다.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