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내 것으로 만들겠다며 움켜쥐고 살다가, 손가락 사이로 모두 빠져나갔음을 깨닫고 그저 허탈했다.
굳건하게 세워놓았다고 생각했던 공든 탑이 스르르 무너지는 게 보였다.
통장 잔고에서,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무응답에서, 가족들의 눈물에서, 내가 확실히 틀렸음이 보였다.
다른 분야에서 다시 시작하면 예전처럼 찬란해질 거라고 1년을 살았다.
나아질 기미가 없음을 뼈 아프게 느끼며, 겉으로는 괜찮은 척 또 1년을 살았다.
3년째부터 '난 내가 별인 줄 알았는데, 개똥벌레였어요.'를 말하고 나서야 여기가 정말 바닥임을 알았다.
반가웠다.
이제 정말 바닥이구나. 더 깊은 지하로 끌려들어 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한 바닥일 거라 믿으니 편안해졌다.
그러나 아니었다.
편안하다고 느끼자마자 그 바닥에도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또 끌려내려 간다. 그것만은 안 된다.
나는 아무래도 괜찮지만,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안 될 일이었다.
내가 없으면 안 되는데,
아직 이 아이들은 칼날 같은 세상을 견딜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스스로 굳건히 서있을 수 있는 훈련을 아직 다 못 시켰는데,
예상치 못한 급작스러운 순간이 다가와서 정말 아무것도 못하게 되면 어떡하지?
그래서 아예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떠날 때가 다가온 사람이 아쉬워하는 순간을 바로 지금이라고 여긴다.
정말로 떠날 때가 가까웠을 수도 있고 100년이 남았을 수도 있지만.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의 엄마처럼, 아이들이 오롯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내 하루를 보내기로 한다.
사후 영혼만 남았을 때, 아이들을 챙겨주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있지 않을까?
사후에 가질 그 소원을 지금 이루는 것처럼 산다.
아침을 아이들과 함께 시작함에 감사하고, 말을 듣지 않는다며 속상해하기보다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만 갖는다.
사춘기 특유의 뾰족한 말을 하면, 언어가 가지는 커다란 힘을 알려준다.
말투가 그게 뭐냐고 화를 낼 필요가 없이.
늑장을 부리고 약속 시간에 촉박하게 되면, '너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야. 꼭 그럴 거야.'라고 정체성을 준다.
또 늦냐고 짜증 내지 않고.
땀 묻은 옷을 아무렇게나 벗어놓아서 냄새가 지독하게 되면, 냄새를 제거하는 방법과 빨래의 수고로움을 알려준다.
이게 뭐냐면서 진저리 치지 않고.
넉넉한 생활과 편안한 환경을 마련해주지 못했다고 미안해하지 않는다.
엄마가 모든 어려움을 막아주고,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하지 않는다.
그저 나의 서사를 들려주고, 결국 스스로 겪어야 함을 말해준다.
내가 언제 떠나도 아이들이 굳건히 삶을 꾸려가도록,
설령 내가 바닥으로 치달아도 담담할 수 있고, 근사하게 재기에 성공해도 아이들이 엄마에게 기대어 나태해지지 않도록,
한 발 물러나 사후 세계에 사는 것처럼 산다.
내일이 없을 수 있으니 오늘이 소중하고,
후회와 잘못은 마치 전생이었던 것처럼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