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는 혼전 순결을 목숨처럼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
모태 신앙 가톨릭 신자인 데다가, 어릴 때부터 '함부로 남자친구를 만나면 큰일 난다.'를 뼈에 새기다시피 하며 자랐기 때문에 남자친구를 사귀면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다.
조선시대 사람이냐며 핀잔을 줄 수도 있지만, 내가 어렸던 30년 전에는 정말 그랬다.
무엇이든 많이 연습해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면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랑에는 적용하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혼전 순결을 강요당하다시피 하기도 했지만, 진짜 이유는 오만함이었을 것이다.
나는 동화책에 나오는 착한 왕자님을 만나서 결혼할 거라는, 나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는 왕비님이 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다. 착하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행복한 삶이 당연히 주어질 거라 믿었다. 좋은 사람을 단번에 알아볼 거라고 자신했다.
사람을 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좋은 남자를 알아보겠냐는 의문조차 가지지 않았다. 그만큼 오만했다.
학벌은 성실함을 나타내고, 말투는 성격을 나타내고, 직업은 꿈을 나타낸다고 단정 지었다. 소개팅 자리에서 몇 마디만 나누면 사람을 파악할 수 있다고 위험천만한 자신감을 자랑하기도 했다.
사람의 첫인상이 실제와 30~40 퍼센트 정도 맞다는 말이 있다. 60~70 퍼센트는 틀린다는 말이다. 첫인상이 기억에 오래 남음을 고려하면, 우리가 그 사람에 대해 판단하는 상당 부분이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을 만난 경험이 없으면 틀린 판단을 할 확률이 훨씬 높아진다.
또한 남자친구를 만나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갈 수 있다. 막연하게 잘생긴 사람이면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만나보면 부담스럽고 늘 불안함에 살아야 해서 오히려 싫을 수도 있다. 돈 많은 집 아들은 부족함을 몰라 성격도 둥글둥글할 줄 알았는데, 지독하게 이기적인 모습에 넌덜머리가 날 수도 있다.
반대로 그런 부분이 싫을 줄 알았는데, 내 남자친구가 잘생겼다면 바람둥이여도 상관없을 수도 있고 상대방보다 내가 더욱 이기적인 사람일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내 자신을 상대방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알아갈 수 있다.
놀던 언니들이 시집만 잘 간다고 눈을 흘길 게 아니다.
오히려 사람 보는 눈을 키우는 노력도 하지 않고, 단번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겠다는 게 도둑 심보일 수 있다.
함부로 사람 만나다가 인생 망가지면 어떡하냐는 염려는, 그 정도도 감당하지 못한다면 결혼은 어떻게 할 수 있겠냐는 질문으로 덮을 수 있다.
많이 해봐야 잘할 수 있다. 사랑도 그렇다.
실패해야 성공할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