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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웅식 Aug 11. 2023

검은 우물

6

현수는 대학에 다닐 때 4‧3에 대한 대자보를 읽은 적이 있었다. 고등학생때는 4‧3에 들은 적이 없었다. 그는 커다란, 하얀 종이에 적힌 글을 보고 놀랐다. 10명 중에서 1명이 죽었다는 내용을 읽고 수업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는 미시경제학 수업을 듣지 않았다.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이 되었지만, 강의실에 가지 않고 대자보에 있는 내용을 곱씹었다. 커다란 대자보가 자신에게 말을 계속 건네는 것 같았다.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쓰지 않은 현수는 비를 맞았다. 학생들이 그 대자보 앞을 무심히 지나쳐갔지만, 현수는 자리에서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글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그는 전율했다. 그는 제주도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4‧3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황 노인은 자신도 잘 모른다며 그리고 알려고 하지 말라며,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 했다. 현수는 자신의 고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고 싶었다. 현수는 제주도의 4‧3 진상을 알아봐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버지 같은 제주도 사람이, 왜 4‧3에 대해 쉬쉬하는지를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비가 조금씩 자신을 적시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걸어 다니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그 후 고향에 갔을 때, 친척들에게 간혹 4‧3에 대해 물어봤고, 그 물음을 들은 친척 중 일부는 그 말을 꺼내지 말라고 했다. 현수는 사람들의 반응 때문에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황 노인은 창문 너머로 내리는 비를 쳐다보았다. 1948년 어느 날,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그 날 때문에, 죽음이 자신 앞에서 어른거려도 내뱉을 수 없는 말이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죽으면 그 사건은 잊혀야 하는, 어느 가족도 알아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황 노인은 자신이 묻힐 때 그 사건도 묻혀야 한다고, 수증기처럼 증발해야 한다고 믿었다. 누군가 그 사건을 알면 그 사건은 다시 누군가의 머릿속을 차지하게 될 것이었다.

 만약 사람들이 부당하므로 불이행하겠다는 14연대 군인들처럼 행동했다면, 경찰과 군인들이 제주도민을 죽이라는 명령을 어겼다면, 황 노인은 그 끔찍한 사건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불타는 집에서 빠져나온 아이, 황 노인은 동굴에서 살아야 했다. 동굴에서 떨리는 손을 얼굴에 갖다 대고 우는 여자가 있었다. 울음소리가 나자 마을 사람들은 조용히 하라며 그녀를 꾸짖었다. 소리가 나면 잡혀간다고 했고 그녀의 남편은 죄송하다며 그녀 입을 손으로 막았다. 동굴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물방울이 천장의 어느 지점에서 모이고, 동굴이 물방울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면 물방울은 떨어져 내리는 것이었다. 아이인 황 노인의 머리 위에 물방울이 떨어지자 그는 졸다가도 잠이 깨버렸다. 사람들은 토벌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릴까 봐 소리에 예민해졌다. 그들은 귀로 동굴 위를 더듬었다. 혹 무슨 소리가 들릴까 귀를 더욱 기울였다.

 동굴에서 불이 피어올랐을 때 그녀는 가끔 웃었다. 그녀가 웃을 때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끝없이 울다 보면 눈물이 나오지 않게 되고, 눈물이 더는 나오지 않으면 웃음이 터지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웃을 때 마을 사람들은 우물을 떠올렸다. 그리고 마을에서 데려오지 못한 거동이 불편한 노인과 어린아이와 불타는 집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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