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십 년이 흘러 지나갔다
날이 흐리다. 입춘도 우수도 지나고 어느새 3월에 들어섰는데, 다시 날이 차다. 그래도 봄은 지척에 와 있다. 삼일절 연휴를 맞아 대전에서 올라온 아들이랑 모처럼 근처로 드라이브를 간다. 30년 가까이 됐던 오래된 아반데가 지난 추석에 광주갔다 퍼져서 폐차했다. 새로 뿝은 차로 아들 운전연습 삼아 차량이 뜸한 곳으로 나갔다. 난 호미를 들고 들판을 헤맬 예정이다. 지난 겨울 진드기에 물려 쯔쯔가무시로 두달이나 고생하며 죽다살아났지만 또 봄이 되니 들판으로 쏘다니고 싶어 온몸이 근질거리는 것이다. 최대한 조심할 것.
공룡알화석산지로 가는 새로 생긴 도로는 한산하다.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세우고 아들이 핸들을 잡는다. 일반 도로에 운전해 나오기는 처음이다. 뒷자리에 앉아서 핸드폰을 보고 있지만 신경은 운전에 쏠린다. 신랑이 옆에 앉아서 요것조것 알려주면서 가고 있다. 이렇게 연습하다가 어느새 자연스럽게 자기 차를 운전하고 자기 길을 다니게 되는 것이겠지.
차는 천천히 우음도까지 올라간다. 일요일은 휴일이라고 팬스가 쳐졌다. 팬스 앞에 차를 세우고 긴장했던 어깨를 푼다. 아들과 아빠는 차를 화재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난 빈 들판으로 내려가 본다. 푸릇푸릇한 양지에 냉이나 쑥이 나 있을 것 같다. 아직 날이 찬지 올라온 봄나물은 보이지 않는다. 너부러진 누런 풀들 사이에 혹시나 진드기가 있을까 깊은 풀숲은 다가가지 않는다. 빈 밭으로만 한 바퀴 둘러본다.
한참 내려가다 보니 공사장 팬스가 쳐진 옆쪽으로 코코넛로드가 깔려 잇다. 무슨 관광지가 근처에 있나 보다. 더 들어가 보았더니 사람이 보인다. 두명이서 하늘을 올려다 보고있다. 하늘에 뭐가 있나. 두세명이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으면 저절로 따라 보게 된다. 쌔애앵 소리를 내며 드론이 날아온다. 근처를 둘러보니 커다란 바위들이 늘부러져 있다. 팬스가 쳐지고 설명서가 쓰인 팻말이 세워진 커다란 바위도 여럿 보였다. 근처가 시화호 개발 이후 공룡알 화석이 발견된 곳이기도 유명하다. 오래된 바위와 암석들이 오래 된 지구 역사의 지층을 보여주고 있다. 한때는 바다였는지 바위 아랫 부분에는 따개비와 굴화석 같은 것이 허옇게 닥지닥지 붙어 있다. 철 성분이 많은지 붉은 빛을 뛴 바위들이 많이 보인다. 온갖 화려하고 희귀한 모양과 색깔의 바위들이 눈길을 사로 잡았다. 가만히 손으로 쓸어보다가 바위에 누워 본다. 지구의 역사가 온몸으로 퍼져들어오는 기분이 든다.
돌을 보는 것이 좋다. 작은 돌도 좋고 중간 돌도 좋고 큰 돌도 좋다. 바위에 드러 눕거나 안겨 있을 때 좋다. 조약돌을 손에 넣고 조물락거리며 굴리고 있을 때도 좋다. 돌이 좋다. 돌의 온기가, 느낌이 , 감촉이, 온도가. 색깔이. 돌은 다 좋다. 적당한 돌의 무게도 좋다. 친구 중에도 돌을 유난히 좋아하는 지우가 있는데 집을 살 때도 돌이 있느냐 없느냐가 기준이 될 정도로 돌을 좋아한다. 돌을 사서 남의 집 마당에 맡겨 두기까지 했다는 돌 메니아 친구가 있다.
돌공원을 한바퀴 돌고는 다시 아들이 핸들을 잡고 공룡알화석산지로 간다. 휴일이라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이 제법 보인다. 아직 비가 내리지는 않아서 천천히 산책하기에는 딱인 날씨다. 공룡알화석산지로 들어서 본다. 나무 데크가 깔린 기다란 길이 길게 늘어서 있다. 시화호 방조제가 생기면서 매립된 습지엔 이제 붉은 빛을 띄던 염생식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갈색의 작고 큰 갈대와 억새만이 허연 바닥위에서 흔들이고 있다. 그래도 모처럼 사방이 탁 트인 공간을 가볍게 바람을 맞으며 걷는 것은 좋다.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다. 중간에 공룡 모형이 있는 곳에서 돌아설까 하다가 공룡알 화석을 직접 본지는 오래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끝까지 가보기로 한다. 벌써 20년이 지났다. 공룡을 좋아하는 아들을 데리고 주말마다 공룡화석이 있다는 곳은 전국으로 찾아다녔던 시기도 있었다. 어느새 20년이 훌쩍 지났다. 지금 옆에서 걷고 있는 이 친구는 20년 전 그 아이와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다른 존재일까. 나도 달라졌고 아들도 달라졌고. 시절 인연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도 그 시간과 환경에 맞는 또 다른 나를 만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빗방울이 조금씩 굵어진다. 공룡알화석 앞까지 간다. 자세히 보니 돌 사이에 확실한 동그라미가 보인다. 공룡알이 온도와 압력을 견디고 화석이 된 것이다. 공룡시대에 있던 공룡알 화석이 지금 내 눈앞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억이 각인되기 위해서는 어떤 압력과 온도가 필요한 것일까. 요즘 눈에 띄게 기억력이 감소하는 것을 느끼다. 일주일 전 일이나 한 달 전 일이 가물가물하다. 일 년 전 일이 가마득하니 옛날 일 같다. 자꾸 깜박깜박 잊어 버린다. 귀한 것이 없는 걸까? 왜 선명하게 기억해 두지 못하고 다 흘려 버리는 것일까. 어떤 말이나 사건이 화석처럼 뜨겁고 무거운 기억으로 각인 될 것인가.
공룡을 좋아하고 어려운 공룡 이름으로 한글을 떼던 너댓살 무렵의 아들이 눈앞에 아련거린다. 돌아오는 길 아들의 핸들링이 자연스러워진다. 이렇게 좀 더 연습하면 자연스럽게 핸들을 잡게 되겠지. 우음도와 공룡화석산지와 아들의 첫 도로 운전이 어우러진 비오는 일요일. 그렇게 또 하나의 흑백사진이 기억 창고에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