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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균실 나왔는데 왜 또..?

짜증은 엄마에게

by 선옥

머리를 자르고 난 뒤, 1인실에 자리가 나 나는 3인실에서 옮겨왔다. 3인실도 넓고 쾌적해서 생활하는 데 큰 불편함은 없었지만, 막상 1인실에 들어와 보니 혼자만의 병실은 훨씬 더 편했다.


1인실로 옮긴 그날부터 호중구 수치가 500을 넘기 시작했다. 앞으로 3일간 이 수치를 유지할 수 있다면, 나는 무균실을 벗어나 일반 암병동으로 나올 수 있었다. 단 3일. 3일만 더 호중구 수치가 떨어지지 않으면, 나는 나갈 수 있다.


면역 수치가 오르면서 몸의 컨디션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헐었던 입 안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고, 음식을 씹을 때의 고통도 거의 사라졌다. 몸이 회복되자 입맛도 돌아왔지만, 아직 무균실 안이기에 먹을 수 있는 건 무균식과 통조림뿐이었다. 무균실을 나간다면 무슨 음식이 먹고 싶다라기 보다 나는 이 구역질 나는 소독 냄새의 무균식만이 아니면 뭐든 좋았다.


다행히 3일 내내 내 호중구 수치는 500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고 나는 호중구 수치 800대에 일반 병동으로 나올 수 있게 되었다. 무균실로 입실할 때처럼 이중으로 잠긴 문을 통과해 나왔고, 내가 입고 있던 무균 가운과 마스크, 헤드캡을 벗어던졌다.


무균실에서는 양압 시스템(Positive Pressure)과 HEPA 필터를 통한 공기 정화가 24시간 내내 작동했다.
공기 중의 세균, 바이러스, 미세먼지, 심지어 피부 각질까지도 걸러지는, 말 그대로 거대한 공기청정기 안에서 살아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무균실 속 24시간 순환되는 차가운 공기는 밤낮없이 피부를 스쳐갔고, 낮은 습도는 피부를 늘 건조하게 만들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높은 압력 탓에 가슴이 늘 답답했고, 창문을 열 수도 없어 바깥공기를 느낄 수조차 없었다.


그런 무균실을 나와 새롭게 배정받은 병상은 4인실의 문 바로 앞자리로 이제는 다른 환자들과 함께 화장실과 냉장고를 사용해야 했고, 의료진의 분주함과 면회객의 발소리가 쉬지 않고 들렸고, 병실 내 환자들은 화장실을 가려면 내 침상을 거쳐 가야만 했지만 무균실에서 나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불편은 사소해졌다.


무엇보다 무균실을 나와 기대가 된 건, 드디어 무균식이 아닌 ‘일반식’이 나올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무균실에서의 아침 식사는 펼쳐보지도 않았다. 기대는 온통 점심으로 향해 있었고, 나는 오랜만에 ‘진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점심시간. 배식 카트가 병실을 돌며 식판이 하나둘 배정되었고, 나 역시 기다렸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내게 건네진 식판은 무균실에서처럼 하얀 소독천에 단단히 싸인 무균식이 었다.


순간, 당황스러움이 얼굴에 드러났다.


“이게 제 건가요?”


식판을 건넨 여사님께 조심스레 물었고, 그분은 이름표를 확인한 뒤
“송수영 맞으세요”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망이 얼굴 가득 번졌다. 어머니께서 간호사 선생님께 여쭤보니,

아직 호중구 수치가 1000을 넘지 않았고, 무균실에서 오늘 막 나왔기 때문에 오늘까지는 무균식을 먹어야 한다는 설명을 들으셨다고 했다.


“차라리 처음부터 무균실을 나온 당일까지 일반식을 못 먹는다고 이야기해 주지, 실컷 기대해 놓고 이렇게 무균식을 줄 수가 있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딱 이럴 때였다.


오랫동안 기다린 한 끼가 또다시 무균식이라니. 그 순간만큼은 배고픔보다 실망감이 더 컸다.

식욕은 있었지만, 무균식만은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나를 달래며 “조금이라도 먹자”고 애썼지만, 나는 그 말조차 듣기 싫었고 결국 그 감정은 고스란히 어머니에게 쏟아졌다.


“안 먹어요. 그냥 치워주세요.”


나는 고개를 돌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무균식 특유의 소독 냄새가 천을 여는 순간 퍼져 나왔고, 어머니는 조용히 내 식판을 들고 탕비실로 향한 뒤 아무 말 없이, 그곳에서 조용히 혼자 식사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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