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응급실에 처음 들어온 날로부터, 어느새 입원한 지 한 달이 지났다.
중환자실을 거쳐 암병동으로 옮겨졌고, 무균실 생활도 해봤으며, 골수검사와 여러 시술·검사들을 받았다.
‘내가 이렇게 정신없이 살아갈 수 있구나’ 싶다가도, 또 한편으로는 시간이 참 지독하게도 흐르지 않아
한 달이 마치 일 년 같았고, 동시에 하루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 병원 생활 중 가장 기다려졌던 순간은 바로 문병 시간이었다. 2012년 당시엔 간호·간병 통합서비스가 도입되기 전이었고, 코로나 이전이기도 해서, 중환자실이나 무균실처럼 특별 관리가 필요한 병동을 제외하면 암병동에서도 면회에 큰 제한이 없었다.
덕분에 많은 이들이 나를 찾아와 주었다. 이날은 어릴 적부터 다녔던 성당에서 사람들이 찾아왔고, 나는 그날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을. 신부님과 수녀님, 성당 친구들뿐 아니라,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들까지도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 마음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기도(祈禱)
신이나 절대적인 존재에게 바라는 바를 말로 아뢰는 일.
종교적 신념이나 마음의 평화를 위하여 신 앞에 자신을 드리는 행위.
‘바라는 바를 말로 아뢰는 일.’
종교적 신념을 떠나, 타인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마음을 다해 비는 이 행위는 그 자체만으로도 참 아름답고 숭고하다. 물질적인 도움이나 시간을 나누는 일처럼 눈에 보이는 수고도 분명 고귀하지만,
기도는 보이지 않지만 진심을 담은, 한 존재를 껴안는 마음의 손길이기에 더욱 특별하다. 그런 기도를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받다니, 나는 참으로 복 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 기도를 받기만 했던 나는 어리석고 이기적인 존재 같기도 했다.
입원 전,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 중 한 명이 오토바이를 타다 교통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처음엔 놀랐지만, 소식이 점점 뜸해지면서 ‘입원 중이니 곧 나아지겠지’ 하고는 나 역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 친구는 결국 세상을 떠났고, 몇몇 반 친구들과 함께 조문을 갔었다.
그때 나는 단지 ‘왜 병원에 있었는데 결국 죽음에 이르렀을까’, ‘남겨진 부모님은 얼마나 괴로울까’ 하는 생각만 했을 뿐 그 친구가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랬던 내가 지금, 중환자실에 머물고 무균실까지 거치며 많은 이들에게 기도를 받는 사람이 되었다.
성당 사람들이 문병을 다녀간 밤은 아버지가 병실에서 함께 주무셨는데,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오늘 내게 기도해 준 분들이 생각나면서 죽은 친구가 문득 떠올랐다.
혼자 중환자실에 누워 그 시간들을 보내며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까. 누구보다 기도와 위로가 필요했을 텐데 나는 왜 그 아이를 위해 기도해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리 작은 기도라도, 그 친구의 안녕과 평화를 빌어주었다면 그 친구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덜 외롭지는 않았을까. 너무 미안해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지금 이 상황이 되어서야 그 친구의 심정을 이해한 것도, 그 친구를 위해 단 한 번도 기도해주지 않았던 것도,
그 아이가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사실조차 몰랐던 것 까지도 너무나 미안해 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보호자 침대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께 그 친구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말씀드리자,
아버지는 조용히 “괜찮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고 그 친구도 이제는 이해해 줄 거야”라고 위로해 주셨다.
"미안해 너무너무 미안해 핑계지만 내가 너무 어려서 철이 없어서 너의 죽음과 고통을 함께 아파하고 위로할 줄 몰랐어.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젠 아무것도 없어서 미안해. 그때 아프고 힘들었던 건 다 잊고 평안하길 진심으로 너를 위해 기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