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현이가 다녀가고 혼자 남은 겨울이었다. 매일 그랬듯이 그날도 영하 40도를 웃돌았다. 잊지 않고 챙겼던 장갑은 용도가 무색할 정도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장을 보면서도, 양쪽에 봉지를 들고서도, 건널목을 건너 메트로를 지나가기까지 계속해서 고민했다. 탈까? 물음을 던지면서도 내 발은 이미 보도를 향해 걷고 있었다. 1.75불을 아끼고 싶은 작은 마음이 이겼다.
30분쯤 걸었을까. 미드타운이다. 업타운보다 덜 반짝이고 비교적 무거운 분위기의 건물이 나란히 이어진 곳. 이제 한 시간만 더 걸으면 된다는 생각에 짐이 덜 무겁게 느껴졌다. 콧물을 삼키기 위해 고개를 위로 들었다. 초록 불의 왼쪽에는 통유리로 된 식당이 있고 창가 자리에 한 가족이 앉아 있었다. 이렇게 추운 겨울에 민소매를 입은 엄마. 분홍색 케이크에 하트 모양의 촛불을 불고 있는 막내딸. 그리고 정성스럽게 포장된 선물을 건네는 다정한 표정의 아빠.
신경질이 났다. 무거워서 아래로 당겨지는 비닐 때문에 손가락에는 빨간 줄이 여러 개 생겼고, 찬 바람은 자꾸만 손등을 때렸다. 왜 하필 이 길로 왔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는 왜 이 겨울에 걷고 있을까. 아까 미적거리지 않았더라면 저 사람들을 보지 않았을 텐데. 손에 쥔 이 봉지 안에는 화려한 홀 케이크도, 한겨울의 민소매도, 백인이란 이름도, 단란한 가족도, 버스비 따위 고려하지 않는 여유로움도 없다. 열등감과 신세 한탄뿐이다. 그만 긁어모을 때도 됐는데 나는 자꾸만 부스러기로 모래성을 만든다. 안정적인 가족에서 오는 박탈감은 영영 지워지지 않는다. 굳은살 없는 사랑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