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박눈이 사선으로 내리는 오후의 연희동에서 h를 만났다. 레모네이드를 들이마신 나는 노트북을 꽉 쥔 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을 말했다. 지금쯤 인쇄에 들어갔어야 할 원고를 모두 엎었다고. h는 눈을 직사각형으로 뜨며 이유를 물었다.
”책을 이만큼 내고 나서야 알게 됐어. 나는 슬프고 잔잔한 글에 소질이 있더라. 근데 책을 팔아 보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야트막한 희망이라도 묻어있는 글이야. 문제는 이전의 책을 쓰면서 이미 흘러간 과거를 돌아보느라 내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해졌는데, 이제 와서 어떻게 그런 글을 쓰냐는 거야.” 답답한 마음을 잔뜩 토해냈다.
“원고 보여줘 봐.”
h는 껌뻑껌뻑 거리면서 내 원고를 들여다봤다. 오늘 만난 이유는 따로 있었다. h는 오래전부터 글을 쓰고 싶어 했고 나보다도 먼저 작가 아카데미에서 수강을 했던 친구였다. 그렇게 시동만 걸더니 대뜸 찾아온 무업 기간 동안 글을 쓰고 싶다고 연락이 왔다. 소설을 쓰고 싶어.
“읽어보니까 원래 네 글이랑 의식해서 넣은 글이 구분되네. 나는 전자가 더 좋아.”
“왜?”
“네 책이잖아.”
“그렇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거랬어. 내가 요즘 이사하면서 집을 꾸미고 있잖아. 다른 사람의 취향으로 내 공간을 채우면 안 되더라. 후회만 남아.”
우리는 대화 내내 서로가 하는 말을 각자의 메모장에 받아 적었다. 대화록을 작성해야 하는 친구 사이라니. 제법 낭만적이다. 보름 동안 자발적 은둔생활을 했다고 말했더니 h가 오늘도 나오기 싫었을 텐데 와줘서 고맙다고 했다.
“너는 다르지! 넌 언제든지 만나지.”
신기하다. h와 나는 이십 년 동안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는데도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우리는 다음 만남까지 결과물을 가지고 오기로 했다. 그리고 각자 계획하고 있는 것들을 착실하게 해내기로 약속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메모장을 찬찬히 읽으면서 올해의 첫 새싹을 틔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