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요한 3서 1장 3절)
요한 2서와 3서에는 진리라는 단어가 많이 나온다.
아주 중요한 재판이 있었다. 세계사를 통틀어 두 번 다시없을 역사적인 재판이다. 빌라도가 재판장이 된 예수의 재판.
빌라도가 먼저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고 묻는다. 이에 예수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빌라도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라고 되묻는다.
이번에는 예수께서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해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한복음 18장 37절)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말하는 왕이 아니라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난 진리의 왕이라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자 빌라도는 질문을 던졌다.
"진리가 무엇이냐?"(요한복음 18장 38절)
빌라도는 무식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고 유대 총독까지 된 사람이다. 빌라도는 당연히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에서 규명한 진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왜 그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물었을까? 빌라도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리와 예수께서 말하는 진리가 뭔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신학자들은 말한다.
그가 철학적으로 알고 있던 진리는 '사물과 사실에 관한 진리' 였다면 예수가 말하는 진리는 '삶과 구원에 관한 진리'였다.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 중 한 명이다.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같이 지냈으며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했던 제자였다. 오늘 말씀이 있는 요한 1,2,3서는 요한의 말년에 쓴 서신들이다.
요한이 말하는 진리는 빌라도가 알았던 진리나 세상에서 말하는 진리와는 다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 즉 성경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진리는 사랑과 분리될 수 없다. 진리를 행하는 것은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삶을 의미한다. 진리 안에서 거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식적으로 진리를 아는 것을 넘어 그 가르침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다.
요한은 가이오라는 사람을 크게 칭찬하고 있다. 요한 3서 1절에서 요한은 가이오를 참으로 사랑하는 자라고 말하며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라는 축복을 한다. 가이오는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을까?
가이오는 고린도 사람이다. 그는 신실한 사람이었으며 나그네와 어려운 형제들에게 베풀고 나누기를 즐겨했던 사람이다. 자기 집을 내어 주고 식사를 대접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봤다. 그는 삶에서 사랑을 실천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바울 서신에도 나오는 사람인데 그의 삶에서의 실천이 요한 사도를 무척 기쁘게 한 듯하다.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에 대해 묵상하는 시간이었다. 가이오와 같은 삶을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