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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u Ming Jun 26. 2024

너는 호구냐?

호구여도 괜찮아 #24 : 하악골융기 (골)


형은 5성 호텔, 동생은 모호텔(모텔+호텔)


2019년 1월, 새해가 밝았지만 나는 여전히 글로벌 Top 회사 프로젝트의 소용돌이 안에 갇혀 있었다.

매일이 마치 폭풍우 속에 있는 것처럼 젖어버린 옷을 갈아입지도 못한 채 고객의 온갖 비난을 버텨내야 했지만,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중국의 변두리 도시 안으로 형이 온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기다려졌다. 이 도시는 상하이에서 국내선을 갈아타고도 두 시간은 더 가야 하는 내륙 깊숙한 곳이었기에, 형과 이곳에서 만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사면초가에 놓인 듯 사방에서 울리는 초가에 정신이 나갈 갓 같았지만, 마음속에 기대되는 일이 생기니, 활력이 생겼다. 마치 아이처럼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형이 오는 날만 기다다.


형은 나와 두 살 차이로 모범생 그 자체였다. 단 한 번도 부모님 말씀을 어긴 적이 없었고, 사대문 안의 학교를 졸업해서 대기업에 입사했다. 이후에도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고 알뜰하게 모아 자기 돈으로 결혼도 하고 집도 사고 부모님께 냉장고와 에어컨까지 사드린 효자였다. 나는 그런 형과 여느 형제처럼 시큰둥하게 지냈지만 적어도 우리 집의 윗물아랫물 보다 맑은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드디어 형과 만나기로 한 날이 되었다. 이날 나는 퇴근 시간을 6시로 정해두었다. 이 특별한 날을 위해 고객과 동료들에게 친형을 만난다는 사정을 설명하고 저녁만큼은 양해를 구했다. 심지어 까다로운 고객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즐거운 저녁 식사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모술수) 부장 은 마치 오늘을 기다렸다는 듯, 평소에는 하지 않던 전화를 특별한 일도 아닌데 팀 사람들이 돌아가며 락해 왔다. 형을 기다리며 연신 울려대는 전화를 받다가 멀리서 걸어오는 형을 보았다. 나는 어린 시절 늦은 저녁 놀이터에서 엄마 대신 나를 데리러 온 형을 만난 듯 손을 좌우로 크게 휘저으며 형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형, 여기야. 형! 근데 여기까지 왜 왔어?"

나는 형 중국의 강서성까지 슨 이유로 출장을 오게 됐는지 궁금했다.


"여기에 공급업체를 평가해야 해서 왔어, 그런데 이 업체가 너무 수준에 못 미쳐서 생각보다 오래 걸리네."

형은 이곳에 있는 공급업체를 관리하기 위해 출장을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잠시 호텔에서 챙겨 와야 할 게 있다며, 나에게 괜찮으면 같이 호텔에 가자고 했다.


나는 형을 따라가며 생각에 잠겼다. '형은 공급업체 심사를 위해 출장을 나왔는데, 동생인 나는 그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이곳에서 몇 년 동안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있구나...' 초라함에 자조적인 미소가 지어졌다.


형이 묵는 호텔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형은 이 도시에서 몇 안 되는 5성급 호텔에 묵고 있었다. 호텔 로비에 들어서니 천장에 매달린 커다란 샹들리에 조명이 거울처럼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뭘 도와줄지 묻는 호텔 직원들에게 쿨하게 손짓하는 형을 따라 나도 이곳에 묵는 손님인 양 자연스럽게 로비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도 자존심이 있다. 그래서 두리번거리고 싶지 않았지만 자꾸만 고개를 두리번거리게 됐다. 화려한 로비의 1층에 있는 고급 일식점과 2층에 있는 통유리로 된 피트니스 센터가 신기했다. 방에 들어서니 침대가 있는 방과 거실이 나누어져 있었고, 화장실에는 윤이 나는 욕조가, 방 안에는 팔걸이가 있는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반면 내가 묵는 곳은 하루 숙박료가 인민폐 300위안(약 5만 5천 원)이 채 되지 않는 곳이었다. 호텔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했고, 모텔보다는 약간 나은 수준이었다. 모텔과 호텔의 중간쯤에 위치하지만, 사실상 모텔에 더 가까운 곳이었기에 우리는 이 숙소를 '모호텔'이라 불렀다.


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는 오피스텔을 개조한 숙소에 묵었는데, 화장실에서는 하수구 냄새가 났고, 열흘이 지나도 침대 시트를 바꿔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의 모호텔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형의 숙소는 순백처럼 하얗게 정리된 침대 시트와 은은하게 적당히 켜진 조명, 미끄러질 듯 잘 빠진 욕조를 갖추고 있었다. '부럽다'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나는 팔걸이가 있는 갈색의 일인용 가죽 소파에 앉아 형을 기다리며 생각에 잠겼다.

'같은 어머니 배 속에서 나왔는데 나는 뭐 하고 살았나...'


"야, 뭐 해~ 다 챙겼어, 가자!" 형은 내 얼굴빛이 안 좋은 것을 눈치챘는지 빨리 나를 데리고 나가 맛있는 것을 사주고 싶어 재촉했다.


평소 공장에서 종이 맛이 나는 빵으로 끼니를 때웠기에, 이 도시에서 괜찮은 식당이 어딨는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도 맛있다고 소문난 중국 동베이 음식점을 현지 직원으로부터 소개받아 형을 안내했다. 형은 가게가 작고 허름하다고 생각했는지 시간이 늦어서 호텔에서 사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또,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마음껏 시키라고 다.


나는 형에게 지난 3년의 시간을 하소연하듯 털어놓았다. 권 부장의 권모술수에 당했던 이야기,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겨우 일궈낸 중국 사업을 권 부장 팀에게 넘겨주고 지금의 Q사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 그리고 지금 Q사 프로젝트마저도 권 부장 팀에게 뺏길 위기에 처한 이야기까지 했다. 그런 와중에도 권 부장 팀의 차 부장들은 쉬지 않고 돌아가며 전화를 걸어와 고객 대응을 해달라, 보고서를 써야 하는데 내용을 모르겠다며 끊임없이 나에게 일을 미뤘다.


나는 권 부장(시어머니)보다 그 팀원들(시누이)이 더 미웠. 권 부장은 중국 사업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고 나에게는 중국 영업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러나 앞단의 성과들을 그대로 상속세도 없이 물려받으며 입사한 권 부장의 전 직장 후배들은 막장 드라마의 시누이처럼 나에게 덫을 놨고 견제하며 비방했다. 그들에게는 회사의 이익보다 권 부장의 이익이 더 중요했다.


그들이 묻는 것은 출장 순환조와 근무 편성에 대한 내용이었다. 술적인 내용도, 프로젝트 일정도 아니었기에 충분히 차부장급에서는 순발력으로 대응이 가능할만한 것들이었다. 또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을 걱정해서 누구든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도식화했고 그에 따른 엑셀표도 만들어 공유를 한바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돌아가며 전화를 걸어왔다. 짧은 시간 동안 열 번쯤 전화를 받자 형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권 부장 팀에게 숙소에 돌아가는 길에 전화하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야! 그럼 하나만 물어보자"며 막무가내로 말꼬리를 이어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수록, 나는 동생이지만 형에게 창피했다. 안 그래도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마당에, 저녁 식사를 하는 몇 시간조차 자유롭지 않은 회사에 다니고 있는 모습 보고 있자니 창피함에 몸서리가 쳐졌다. 는 급기야 휴대폰 전원을 껐다.


형은 놀이터에서 친구들에게 맞고 온 어린 동생의 이야기를 듣는 듯 안타까워하며 답답해했다. 앞에 앉아서 안절부절못하며 죽상을 하고 있는 나를 보던 형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너는 호구냐?"


나는 머리를 망치로 맞은 듯, 1분 정도 말을 잃었다. 형의 말이 맞았다.


맞다. 나는 호구였다.


회사를 7년 넘게 다니며 중국 사업을 일구기 위해 생고생을 했고, 그것도 모자라 Q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권 부장 무리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다. 그러면서도 일은 묵묵히 다 떠안고 있으니 그야말로 호구가 따로 없었다.


그날 술에 많이 취해 글씨가 삐뚤빼뚤하다...ㅠㅠ


식당 종업원을 불러 펜과 종이를 달라고 했다. 종업원은 펜은 있지만 종이는 없다고 하여 어쩔 수 없이 식당 티슈에 글을 옮겨 적었다. 나는 티슈에 쓰인 글자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몹시 분했다.

나는 그저 순수한 의도를 가진 동료들과 일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그 작은 소망 하나 이룰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한들, 경영진은 오로지 Q사 프로젝트의 성공으로 자신들이 얻을 성과와 결실에만 관심이 있을 뿐, 그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실을 만들어내는 우리의 노력에는 무관심했고 무책임했다.


이제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만 남아 있었다. 권 부장에게 굴복하고 그의 수족이 되거나,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다. 나는 티슈에 쓰인 글을 다시 한번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이후, 며칠이 더 흘렀으나,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빡침'을 누를 수 없었다. 아무리 백번 양보해도 내가 왜 이렇게까지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며 회사 생활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음속에서는 불 같이 화가 났고, 화를 누르기 어려웠지만, 아내와 먼저 이야기할 의무가 있었다.

"여보, 미안해. 오래 생각해 봤는데 휴직을 하든, 퇴사를 하든, 문제를 개선하든, 이대로는 나는 계속할 수가 없네. 자세한 건 한국에 가서 이야기할게."


아내는 이미 수년간 내가 집에도 잘 못 들어오고,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는 상황을 알고 있었다. 내가 말은 자세히 하지 않아도 그녀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아내는 원하는 대로 하라고 했다.


결국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겠다고 선언했다.

"어디 한번 나 빼고 너희들끼리 잘해보든 마음대로 해보라고 해." 나는 내 마지막 카드, 사표를 꺼내 들었다.




다음 출장 인계자가 올 때까지 한 달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나는 맡은 바 업무를 완수했다. 출장 복귀 날, 저녁 12시 반에 퇴근을 하고, 고객사 앞의 아주 작고 허름한 중국 식당에서 아끼는 후배 한 명과 작고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 계란 부침 하나를 중간에 두고 중국 술을 말없이 주고받았다.


한국으로 돌아오고 다음 날, 회사 사장님께 전화가 왔다.

"과장님, 지금 과장님 없으면 안 돼. 내가 간곡히 부탁할게. 그리고 내가 반드시 보상할게."라는 내용으로 30분 정도를 통화했다. 나는 사장님께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한 후, 나의 생각을 정리하여 메일을 드렸다. 사장님은 반드시 보상하겠다는 약속으로 메일을 회신하셨다. 나는 사장님의 약속을 믿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사장님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는 몇 년 뒤, 더 이상 이 회사의 사장이 아닐 때 나의 생일에 카카오톡으로 케이크를 선물했다. 어쩌면 사장님은 약속을 지켰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생각하는 나의 가치는 카카오톡의 생일 쿠폰이었을 수도 있으니...




여하튼, 나는 박쥐가 날아다니는 도시로 복귀했다. 나의 공백으로 인해 고생한 동료들에게 미안했다. 나는 그 후로도 6개월을 더 스스로를 갈아 넣어야 했다. 그래도 하루 여섯 시간은 자고 삼일에 한 번은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다운 생활을 조금씩 찾아가고 있었다. 서른여섯 살 생일에 스스로에게 선물을 한다고, 계란과 소고기 편육 10위안어치를 더해 25위안짜리 우육면(4500원) 짜리 점심을 큰 마음먹고 시킨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고객사 앞 유일하게 따뜻한 국수를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제는 죽어도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권 부장이고 나발이고 내가 이 상황에 진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지만 매일매일을 버텨도 3년을 했으니 실제로 남아 있는 체력이 많지 않았다. 중국 유학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김밥을 팔자던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친구는 가게도 여러 개 가진 사장님이었고 30대 중반에 이미 돈도  벌어 편히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친구는 묵묵히 나의 이야기를 듣더니 전화를 끊자마자 메시지와 사진을 보냈다.


"나도 이렇게 살아, 우리 조금만 힘내자"


누구나 좋은 친구를 만나는 행운이 찾아온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꽤나 운이 좋은 사람이다.


호텔에서 큰 행사를 마치고 정리하는 중이라고 했다


시간은 어떻게든 흐르게 되어있다. 단지 어떤 시간은 참으로 느리게 흐르는 것뿐이다. 군대가 있을 때가 그랬고 중국에서 글로벌 Q사의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던 시간이 그랬다. 그렇게 반년의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 도저히 이제는 할 일이 없다고 생각될 만큼 현장이 안정 됐을 때, 함께 고생해 준 중국 현지 직원들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했다. 커다란 원형 탁자에 앉아 스무 명의 중국 직원들이 환송회를 해줬고 이십 대 초반의 직원들은 나를 부둥켜안고 고생했다며 고마웠다고 눈물을 보였다.




3년간의 Q사 프로젝트를 마무리하고 박쥐가 날아다니는 도시를 떠나는 마지막 날, 나는 공항에서 68위안(1.2만 원) 짜리 우육면을 주문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지난 3년 반의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먹은 캉스푸 우육면


내 인생의 가장 큰 도전이었다. 

쉽지 않았다. 아니 매우 어려웠다. 처음에는 단호한 결심으로 시작했지만, 세상은 나를 가혹하게도 시험했다. 나를 자극했고, 열정에 불타게 했고, 열받게 했으며, 울게 하기도 했고, 오기만 남게 만들기도 했다. 한 발 한 발, 매일 밤 끝없이 지쳐가는 그 시간 속에서도 나 자신을 믿으려 노력했다. 포기하고 싶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입원이라도 하며 잠시라도 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끝까지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그 순간의 성취감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내가 비록 전문직도 대기업에 다니는 것도 아니었지만, 당당히 고개를 들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나의 인내와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적어도 나는 3년의 시간 동안 무한히 성장했고,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우육면이 식기 전, 나는 그릇에 얼른 수저를 가져갔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먹어본 우육면 중에 가장 맛있는 우육면이었다.


내가 이렇게 맛있는 우육면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함께 해준 동료들 덕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많이 미안하고, 그 힘든 시간을 같이 버텨줘서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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