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한 이유

발리에서 만난 '라스티니' 가족 이야기

by 김찐따

우리 아이는 정말 아침잠이 없다. 매일 새벽 5시나 6시면 벌떡 일어나 집 안을 돌아다니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일찍 깬 아이는 집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집 주변의 길을 뛰어다니던 아이를 따라가며 골목 안쪽으로만 다니게 했는데, 어느새 내리막 끝까지 내려갔다. 그리고 아이를 잡으려던 나를 멈춰 세운 건 낯선 여인의 밝은 목소리였다.


"Halo!"


길 끝에서 우리를 반갑게 맞아준 건 요리를 하고 있던 한 현지 여성이었다. 그녀는 작은 차고를 개조한 가게에서 추러스를 만들고 있었다. 내게 어디서 왔냐고 영어로 묻던 그녀는,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인니어로 대답하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신기해했다. 바하사(인니어)를 할 줄 아는 외국인을 만난 게 새로웠는지, 그녀는 내게 쉴 새 없이 질문을 이어갔다.


그녀의 이름은 라스티니. 추러스와 커피를 포함한 각종 점심을 판매하는 작은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위해 추러스를 한 접시 주문했다. 설탕과 초콜릿이 듬뿍 묻은 달콤한 추러스는 아이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가게 주변을 둘러보니 흰색 개, 고양이 부부, 잉꼬 새 부부가 살고 있었고, 건너편 공터에는 닭과 병아리들이 뛰놀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작은 동물원이 생긴 셈이었다.



그 순간 이후로 아들은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매일 '라스티니' 가게로 향했다. 어느 날은 비가 일주일 내내 내리는 바람에 외출조차 힘들었는데, 그 가게는 우리에게 작은 동물원이자 아지트가 되어 주었다.


IMG_3332.jpeg 골목 맨 끝집인 추로스집. 아이는 매일 아침 7시 이곳으로 출근한다. (가게오픈 8시..)
IMG_3310.jpeg Ibu Lastini의 가게에는 도기(개), 곤잘레스/체리(고양이부부), 닭과 병아리 그리고 새가 있다. 이곳은 내 아이의 작은 동물원이 되었다.


라스티니 가족과의 인연

라스티니가족은 남편과 삼 남매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째 아들 아디는 가게를 돌보며 부모님을 돕고 있었고, 둘째 딸 시스카는 대학생이라 주말에만 집에 있었다. 셋째 꼬망은 아직 초등학생인데 외국인이 다소 수줍은 어린아이였다.


첫째 아디는 아들을 친동생처럼 돌봐주었다. 아이를 번쩍 안아 새를 보여주고, 공터의 그네를 태워주며 웃음을 터뜨리게 하고, 경계가 심한 내 아이의 낮잠도 챙겨주었다. (2명의 동생을 키운 경력직이라 육아 스킬이 상당하다..) 한 번은 매번 차를 몰고 다니는 내가 불편해 보였는지 "남자라면 오토바이를 탈 줄 알아야 한다."며 경계심에 발버둥 치는 아들을 앉혀 오토바이를 태워주었다. 덕분에 그 경험 이후로 내 아들은 오토바이를 탈 수 있게 되었다...


IMG_3537.jpeg 육아 경력직 아디, 단숨에 아들을 재워버린다.
KakaoTalk_Photo_2025-01-14-11-22-46.jpeg 아들의 첫 오토바이 시승식


아디의 여자친구인 뿌뜨리는 가게에서 종종 만났었는데, 틱톡에서 몇 마디 한국어를 배워왔다며 아들에게 한국말로 말을 건네주고, 첫째 아들 아디와 데이트를 갈 때 굳이 내 아들을 데려가주었다. 자신들이 발리에서 내 아들의 아빠, 엄마라고 하며 애정을 담아 아들을 대해줬다. 인연이 되어 뿌뜨리는 현재 대학생활을 병행하면서도 시간이 될 때, 외부 일정이 있는 나를 대신해 아들을 챙겨주고 있다. (뿌뜨리는 대학생활도 하면서 틱톡 라이브로 옷을 팔고, 핸드폰 하나로 피티제작, 브랜딩, 영상편집도 직접 하는 대단한 여성이다..)


KakaoTalk_Photo_2025-01-14-11-23-13.jpeg 자전거를 태워주고 있는 뿌뜨리


둘째 시스카는 짐바란 쪽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어, 주말에만 만나게 되었는데 "오빠 꼬레아(한국 오빠)"라고 아들을 불러 세우며 특유의 밝은 에너지로 말을 걸었다. 말이 없는 내 아들에게 무한 질문을 하며 친해지려 노력하고 귀여워했다. 셋째 꼬망은 아들에게 고양이와 새를 보여주며 작은 동물원 구경을 담당하고, 내 아들과 플레이 데이트도 해주었다.

KakaoTalk_Photo_2025-01-14-11-22-58.jpeg 내 아이와 플레이데이트를 해주는 귀여운 꼬망


어느 날, 이부 라스티니는 애랑 매일 붙어 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내가 묵고 있던 숙소에 찾아와 말했다.


"매일 애랑 붙어 있지 말고, 저희가 얘를 좀 볼 테니 혼자 바람 좀 쐬고 오세요. 애는 저희 집에서 놀면 돼요~"


한창 아이 돌봄에 지쳐 있었던 내게 아주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그것도 내가 하는 부탁이 아닌 타인이 나를 직접 찾아와 잠시 스스로의 시간을 가지고 오라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있던가...? 묘한 감동이 밀려왔다. 애와 단둘이 매일 붙어 있는, 휴식시간이라고는 따로 없던 나에게 라스티니의 가족은 종종 커피 한잔의 여유와 단비 같은 쉼을 선물해 주었다.



나의 새로운 발리가족

이후로 내 아들은 어느새 라스티니 부부의 "끄뚯(넷째)"이 되어 그 집의 막내로 불리기 시작했다. 라스티니 가족은 이웃 이상의 존재가 되었고, 발리에서 우리의 새로운 가족이 되었다. 평소 한국에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큰 정을 나누지 않던 아들은 라스티니 집에서 낮잠을 자고, 함께 식사를 하고, 때로는 내가 급히 볼일이 생길 때 아디, 꼬망(셋째)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라스티니 가족은 단순히 친절한 이웃이 아니라, 우리에게 삶의 여유와 인간적인 온정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


발리에서의 시간이 쌓일수록 나는 이곳이 아이와 나에게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 깨닫게 되었다. 추러스 가게에서 시작된 작은 인연은 형제가 없는 아들의 성장에 큰 발판이 되었고, 나에게는 마음의 여유와 가족의 정을 심어 주었다. 라스티니 부부와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갈 이야기는 앞으로도 내 아이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이제 단순한 속담이 아니라,

나의 삶에서 깊은 의미를 가지게 된 진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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