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는 나의 운명(?)
내 아이는 자폐스팩트럼으로 꼬박 5년 동안 각종 치료를 받아왔다. 주 20시간 이상의 집중적인 치료가 필요하다는 의사 선생님의 권고에 따라 ABA(응용행동분석), 특수체육, 언어, 감각통합 등 매주 5~6회의 치료와 홈티(가정방문 치료)를 병행하며 월 250만 원씩 쏟아부었다. 아이의 치료를 위해 나는 더욱 열심히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치료를 맡긴다고 해서 마음이 놓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답답하고 조급한 마음만 커졌다. 치료사 분들 조차도 아들을 "완벽한 자폐스팩트럼"으로 단정 짓기 어려운 친구라는 얘기를 종종 들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상호작용의 어려움, 감각에 대한 민감성, 제한적이고 반복된 행동, 변화에 대한 높은 불안감 등 자폐의 주요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소근육 발달이 정상이고 인지능력에 큰 문제는 없으며 사람에게 애착 행동을 보이는 모습이 "애매하다.."는 의견을 만들어 냈다.
일부 치료사 분들은 아스퍼거 증후군일 가능성을 말씀하셨지만, 언어발달이 정상적인 경우가 많은 아스퍼거와는 또 다소 달랐다. 진단명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이라도 내 아이를 더 이해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늘 갈증처럼 남아 있었다.
그런 시간 속에서 나는, 내 아이의 말과 목소리를 간절히 기다렸다.
내가 바랬던 건 크지 않았다. 단 한 번이라도, 아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었다. 하지만 5년간의 기다림은 늘 길고 고독했다. 말을 떼지를 않자 주변에서는 "엄마가 말이 많아야 돼."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고, 아무리 노력해도 아이는 "물"이라는 단순한 말 한마디조차 해주지 않았다. 말의 의미는 이해하고 있다는 이야기에 그나마 희망을 품었지만, 내 목소리가 허공에 맴돌 뿐이라는 사실은 날마다 마음을 무너뜨렸다.
재잘거리며 부모 손을 걷고 걷는 아이들, 작은 심부름을 척척 해내는 아이들, 또래 친구들과 다투는 모습조차 내겐 멀게만 느껴졌다. 때로는 아직 자폐스팩트럼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사람들부터 "애들이 말하기 시작하면 골치 아플 거야. 지금을 즐겨. 느린 애들 있잖아, 나중에 다 한 번에 터질 거야." 같은 위로를 들을 때면, 그 위로조차 내 마음을 시리게 했다.
발리에 온 지 한 달쯤 되었을 때였다. 아들이 열이 나서 약을 먹여야 했지만, 평소 약을 극도로 싫어하는 아들을 달래고 붙잡아 억지로 먹이느라 진이 다 빠진 하루였다. 그날도 어김없이 허공에 맴도는 "약을 먹어야 해."라는 내 말로 가득한 방 안에서,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야!!!!"
얼어붙었다. 순간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혼란스러워 눈을 크게 뜨고 멈춰버렸다. 방 안에는 정적이 흘렀고, 나도 모르게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아이의 목소리를 들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아 수없이 그 순간을 떠올렸다.
이후로 아이는 조금씩 말을 시작했다. 아이들은 부정어를 먼저 배운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싫어" "안 돼"처럼 짧고 단순한 말로 말을 시작했지만, 그 말들로 우리 사이에 새로운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무수히 맴돌던 말들이 드디어 닿기 시작한 것 같았다. 아이의 말문이 트였다는 것은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한마디 "아니야",는 내게 아이와 소통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되었고, 더 가까이 아이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가 보낸 첫 발리에서의 한 달은 단순히 새로운 환경에서 지낸 시간이 아니라, 전환점 같은 운명의 시간이었다. (그동안의 치료가 빛을 발해서이기도 하다. 내 아이에게 진심을 다해준 치료사님과 어린이집 선생님들께 늘 감사한 마음뿐이다.)
다행히도 나의 아이는 이후로 조금조금씩 성장해 이제는 간단한 문장 정도는 구사할 줄 아는 어린이가 되어가고 있다. 아직도 눈 맞춤이 어려워 허공에 말하고, 로봇처럼 운율이 없는 말로 나를 불러 세우지만, 아이의 목소리와 함께 만들어갈 이야기들은 그 어떤 이야기보다 소중하고 특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