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변한 시건장치가 없는
교실에 나는 언젠가부터
지갑을 안 갖고 다닌다.
신분증이 없는 내가
어느 날 쓰러진 채로
발견된다면
내 주머니에는 수학놀이 때
나눠주고 남은 클립 몇 개,
하굣길에 일일반장이 반납한 명찰
그리고 학습지 푸느라 입마를 아이들에게
나눠 주고 남은 사탕 한 두 개
그리고 참 잘했어요,
좋아졌어요, 글씨가
또박또박 예뻐요라는
도장들을 골라
찍어 주다 묻은
푸른 얼룩의 손
그리고
마저 매기진 못한
수학시험지더미가
든 종이가방
그리고 거기서
또르르 굴러 나온
채점 색연필
이것으로 내가 누군지 짐작하리라
2023. 9. 4. 새벽에
저는 20년 차 된 초등학교 교사이고 작년 서이초 사건 이후 비통한 마음에 동학년 회의를 위한 채팅방에 위의 시를 올렸습니다. 저는 일을 꼼꼼한다고는 하는데 좀 느린 편이라 학교일을 제 때 못 마치면 시험지 채점이나 공책 검사를 꼭 싸들고 오는 날이 많았어요. 많은 선생님들이 여러 부분이 나와 같다며 공감하셨고 교사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라고 하셔서 뿌듯하였지만 서이초 같은 사건이 일어나 너무나 슬펐습니다. 그런 순수한 마음으로 아이들과 함께 하시는 전국의 선생님들께 이 시를 통해 힘이 되고 싶습니다.